목화는 안피지만 따스함은 면면히…|목화시배지 산청군 단성면 부양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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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부락은5백15년 전인 l366년 삼우당 문익점이 이땅에 처음 목화씨를 심었던 시배지(시배지)이자 민족의 생활사를 뒤바꾸어 놓은 곳이다.
한낱 씨앗에서 경제적 가치를 놓치지 않았던 문익점. 그는 1329년 진주 강성현(지금의 산청군 단성면·신안면일대)에서 출생했다. 자는 일신, 본관은 남평이다.
어려서 이곡에게 배워 나이 30에 포은 정몽주와 나란히 과거에 올랐다. 사신으로 원에 들어가 덕흥군의 막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다 실패하자 교지국(원의 영토)에 귀양을 가게되었고 3년만에 풀려나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삼우당 실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유배지인 교지에서 귀국할 때 목화씨앗 3알을 붓뚜껑(필관)속에 숨겨 갖고 왔다.
문익점은 고향 강성에 있는 그의 장인 정천익에게 주어 심게 했는데 씨앗 3개중 1개가 발아, 그때부터 이 마을의 이름이 배양부락이 되었다.
진주에서 지리산 입구에 이르는 관광도로 바로 옆 1백20여평의 시배지에는 그후 계속해 목화가 재배되고있고 밭 옆에는「문익점 면화여배사적비」가 세워져있다.
그러나 지금은 시배지 이외의 밭에서 목화를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모두들 수익이 맞지 않는 목화재배에서 손을 뗀 것이다.
『해방 전까지 만해도 단성면과 신안면 일대는 온통 하얀 목화밭으로 뒤덮이다시피 했었습니다. 집집마다 무명베 짜는 소리가 요란했었지요.
하지만 해방 후 나일론등 화학섬유가 들어오고부터 차차 없어져 지금은 자기 집 이부자리 만들 정도 밖에는 심질 않아요.』
문익점의 21대손 영생씨(50)는 조상의 혜안(혜안)으로 한국경제사에 끼친 영광만이 이 마을에 남아있다고 한다.
시배지가 있는 배양부탁에는 문익점의 외가인 합천 이씨들만이 60여 가구를 이뤄 살고있고 문씨 후손들은 이곳서 10리 가량 떨어진 신안면 안봉리와 신안리에 주로 모여 살고 있다.
문중 총무인 20대손 정동씨(60)는『이곳 더가 외손이 잘되는 터라는 풍수설 때문에 옮겼다』면서『옛날에는 다 같은 단성현에 속했던 마을이었다』고 설명했다.
신안면 안봉 부락에는 전체 54가구 가운데 32가구가 문익점의 후손들. 20대 손부터 23대 손까지 4대가 담을 맞대고 살고있다.
이 가운데 25가구는 모두 산촌이내의 가까운 친척들이다.
『모두가 우리나라에 목화씨를 처음 들여온 훌륭하신 침정할아버지의 자손들이란 자부심이 크지요. 늘 아이들에게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줘 이 마을 젊은이들은 예절바르고 난잡하지 않아요.』
영생씨는 이곳 후손들은 가난하게 살고있지만 훌륭한 조상을 가진 양반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고 오순도순 살아간다고 자랑한다.
마을사람들은 관혼상제등 큰 일이 있을 때면 30여년전 마을뒷산에 지어놓은 15평 크기의 정자 덕양재에 모여 의논을 나눈다.
대학에 입학한 조카의 등록금마련을 위해 서로 걱정하고 마을앞 논2천 평에서 나온 계전을 어떻게 쓸것인가도 숙의한다.
『지금은 목화를 심지 않지만 누에를 키워 군내에서는 가장 소득이 높은 마을로 손꼽히지요. l만2천여 평의 뽕밭을 가꿔 지난해만도 2천상자(8t·시가2천만원)를 수확했습니다.』
21대 손인 한룡씨(63)는 안봉과 신안마을이 인근 창안마을과 함께 예부터「삼안지지」로 일컬어져 지금까지 한번도 난리의 영향이 없었던. 좋은 땅이라고 자랑한다.
『양반자손들이 사는 곳은 그만큼 다르다』는 것이다.
각 마을의 후손들은 음력3월10일이면 안봉 부락에서 5리 남짓 떨어진 갈노산 기슭의 노산정사(도천서원)에 모여 시제를 지낸다.
이때면 전국각지에서 4, 5백명의 후손들이 찾아든다.
『시제가 끝나면 참석했던 후손들은 서로 가까운 촌수를 따져 각 마을의 친척집에 머무르면서 1년만에 회포를 나누기도 하지요.』 한룡씨는 후손들끼리 그만큼 가깝게 지낸다고 했다.
무명은 문익점이 씨를 들여왔고 그 후손들에 의해 실용화되는 등 남평 문씨들이 이땅에 전해내려준 가장 값진 선물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문익점은 나라로부터 효자비를 얻을 만큼 효성이 지극하여 그 후손들은 조상의 덕행을 지금에 이르러서도 몸에 익혀 실천하고있다.『친정할아버지 나이 47세 때 어머님을 여의셨습니다. 왜구의 침임이 극성을 떨 때였어요. 단성일대에 왜구가 들어와 난장판이 되었는데도 할아버지는 어머님빈소에서 한치의 동요도 없이 호곡하고 있었습니다. 지극한 효성을 본 왜구들은 감히 해치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20대손 정동씨는 왜구들이 떠날 때『물해 효자』(효자를 함부로 해치지 말라)라 새긴 비목을 세워주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실을 짜는「물레」는 문칙점의 손자 중 내라는 사람이 고안해 그의 이름을 딴것이며 또 내의 후손「영」은 베틀을 발명, 목면으로 짠것을 그의 이름을 따 무명(문영의 와음)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배양마을의 목화 꽃은 이제 자취를 감추었어도 민족의 생활의 혁명지로, 효성과 학문숭상이 맥박치는 역사의 현장임을 그 후손들은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산청=이창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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