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6)제73화 증권시장(6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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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증권회사 난립>
5월 증권파동 후 한달 정도 쉰 뒤 나는 62년 7월초 영화증권을 설립했다.
사장에는 김희관씨(현 대유증권 사주)를 교섭했으나 전무로 내정이 됐다고 해서 동명증권 전무 강성진씨를 사장으로 초빙했다.
나는 이사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처음으로 표면에 나섰다.
부사장에는 조흥은행 출신인 최상건씨를 선임했고 현 코스모스 빌딩 맞은편 건물에 간판을 내걸었다.
한달 뒤인 8월7일에는 전 재무부장관 인태식씨를 통해 범일 증권을 새로 설립했다.
사장에 전 동화증권 사장 이태진씨, 부사장에는 전 동서증권 사장 최진수씨가 선임됐다.
인씨는 이사회장이 됐다. 인씨는 국채파동 당시에는 국회예결 위원장으로 정부의 1백80억환 규모의 국채 발행 계획을 원안대로 통과시킨 사람이다.
또 영화 증권과 같은 시기에 공국진씨를 통해 홍익 증권을 설립했다. 동화기업의 승상배 씨가 사장으로, 장창수씨가 감사로 선임됐고 공씨는 이사회장이 됐다.
공씨는 육군 헌병감 출신이었다.
나는 또 이병두 씨의 삼신증권도 인수했다. 내가 연합통신 전무로 있을 때 재무부 사설국장이던 이씨가 내방에 자주 놀러와서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5월 파동 후 곤란하다고 해서 내가 투자 인수한 것이다.
5월 파동으로 통일·일흥 증권 등이 부채로 눌러 있었지만 나는 매매증거금 등으로 들어간 주식이 상당했으므로 이와 같이 증권회사를 신실하고 인수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 당시 약2개월 동안에 24개 증권 회사가 새로 설립됐다.
삼보증권(대표 강영진)이 6월12일, 그리고 거래소 이사장을 역임했던 주기식씨도 아주증권을 세웠다. 이때 증권 회사 수는 60여개에 달해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
5월 파동이 지난 며칠후인 6월8일 재무부에 증권과가 생겼고 초대과장에 주윤호씨(증권홍보협회 부회장)가 임명됐다.
또 7월초에는 서재식 거래소 이사장이 사임하고 9월에는 재무부 이재국장 박동섭씨가 거래소 전무로 오면서 이사장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이사장 직무대행을 했다.
5월 파동과 6월 통화개혁을 마친 후 재무부 장관도 천병규씨에서 김세련씨로 바뀌었다.
김 장관은 박승준씨가 거래소 이사장이었을 때 한국은행 문서부장으로 있다가 거래소 상무이사(59년5월19일∼60년9월1일)를 지냈기 때문에 잠시 증권계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김 장관은 증권금융을 풀어 증시를 더 활기 있게 해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5월 파동 때의 특별금융 1백억원(통화개혁으로 10억원)의 회수를 강력히 독려했다.
일단 갚아야 다시 융자를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증권회사들은 김 장관의 말을 믿고 상환했으나 재무부에서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김 장관을 찾아가 합의를 하기도 했으나 김정렴 차관을 만나보라며 발뺌을 했다.
5월 파동을 겪고난데다 자금압박까지 겹쳐 증시는 계속 위축된 상태였다. 증권시장에 대한 일반국민들의 인식도 많이 나빠졌다.
주식을 사기만 하면 돈을 번다고 생각하고 증시로 몰리던 투자자들은 반대로 증시를 외면했다.
영화증권을 설립하고부터는 사무실에 매일 출근했다.
영화증권의 강성진씨, 홍익증권의 승상배씨, 범일 증권의 최진수씨 등은 매일 아침 남산동 나의 집에 모여 그날 그날의 업무 계획을 상의했다.
범일 증권의 이태진 사장은 대흥 증권(전 통일증권) 사장으로 가고 최씨가 사장이 됐다.
승상배씨와 최진수씨는 나의 계획대로 홍익·범일 증권 회사에서 매수를 하고 다른 증권회사에서도 자기명의로 매수를 더했으나 강성진씨는 다른 증권회사에서 더 많은 보도주문을 내고있다는 소문이었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증권하는 사람들은 생리적으로 매수와 보도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게 마련이다.
승씨와 최씨는 둘 다 매수형이었고 강씨는 매도형의 사람이었다.
3사의 보조가 나의 생각대로 잘 맞아 들어가지는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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