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중국을 염원…손문과 결혼"|중공의 정치제물로 90평생마친 송경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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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현대 중국의 분열을 상징해온 송경령·미령 두자매는 결국 만나지 못했다. 두 자매는 지난32년간 한가족의 진정한 재결합을 통해 중국의 통일을 갈망해왔다. 중국의 국부 손문의 미망인인 경령(90)이나 장개석총통의 미망인인 미령(80)은 서로의 정치적 입장때문에 각각 중공과 자유중국에 살면서 두개의 중국의 비극을 상징해왔고, 그들의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통일의 징검다리가 될것으로 널리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정치적 제물로 이용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중공은 특히 경령의 죽음을 앞두고 중공자체의 정치에 이용해 주목을 끌었다.
중공은 최근 경령에게 명예국가주석직위를 부여함으로써 국가주석직(국가원수)의 부활을 사실로 만들었다.
등소평 (당부주석) 휘하의 실권파는 지난 6개월간의 권력층안의 갈등을 극복하는 방편으로 경령의 죽음을 호기로 삼은 셈이다.
더구나 등소평의 실권파에 팽팽히 맞서온 엽검영 (건국인민대표대회상무위원회위원장) 이 송의 문병차 장기간의 광주생활을 청산하고 북경에 올라가 6월중순으로 예정된 중공당대회의 참석에 길을 터놓았다.
또 중공은 경령의 죽음을 앞두고 언론이 연일 그녀에 관해 머리기사로 크게 보도함으로써 경제졍책의 실패로 야기된 국민들의 불만의 시선을 애국과 통일이라는 문제로 돌리게 했다.
송경령은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에드거·스노」에게『나는 공산주의자들을 진실로 신뢰하지 않는다. 모택동 (전중공당주석)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덜 싫어할 뿐이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녀는 또 58년 한 저서에서『나는 어떤 중국지도자들도 신뢰하지 않는다. 오직 손문선생만 믿을뿐이다. 손문선생은 세계의 장래를 훤히 꿰뚫고 대국을 이해한 분이다. 국부는 중국인 같지 않은 형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와같은 그녀의 독백속에는 자신의 순수한 애국적 정열이 중공에서 한낱 선전거리로 이용되고 있다는 강렬한 반발이 도사려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그녀가 임종을 앞두고 중공당이 갑작스럽게 그녀의 공산당입당을 승인한것을 과연 달가와했을까.
66년과 67년에는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홍위병 청소년들이 그녀의 상해집을 쑥밭으로 만들고 그녀에게 지나친 부르좌적 생활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었다.
그녀의 지상명제는 부군 손문의 유지를 받들어 중국의 통일을 이룩하는 일이었다. 49년 모택동이 상해에 있던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 신생중국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을 때도 그녀는 그것이 중국의 통일이라는 대명제에 순응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명목상으로는 중공권력층의 핵심에 있었지만 한번도 통치의 중심에는 가까이 못했고, 어떤 서방측인사의 표현대로『조롱에 갇힌 새』의 신세에 지나지 않았다. 단지 국공 통일전선의 상징으로 시종했을 따름이다.
송경령은 1890년(추정) 에 백만장자의 집안에서 6남매의 둘째로 태어나 미국의 웨슬리대학을 나왔다. 언니 애령, 동생 미령도 이 여자명문대학을 졸업했다. 세평대로 언니 애령은 돈을 사랑해서 금융재벌 공양희와 혼인했고, 동생 미령은 권력을 사랑해서 장개석총통과 혼인했지만 경령은 중국을 사랑해서 손문과 혼인한 것인지는 알길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웨슬리대학 재학중 1911년 청조를 넘어뜨린 신해혁명이 일어나 아버지가 신생공화국의 청천백일기를 보내자 그것을 기숙사에 걸고 혁명을 열렬히 지지했다. 13년 대학을 졸업하고 언니의 뒤를 이어 손문의 영문개인비서로 일하면서 점차 연모의 정이 깊어『손문선생이 없는 생활을 상상할수 없다』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24살이라는 나이차이와 부인을 가진 남자라는 장벽은 그녀에겐 문제가 되지않았다. 그녀는 손문선생이 망명중인 동경에서 14년 그와 혼인하는데 성공했지만 25년 북벌의 성공을 목전에 두고 손문은 북경에서 병사했다.
송경령은 손문이 임종에서 『평화, 투쟁…중국을 구하라』고 헐떡이면서 간신히 내뱉은 최후의 말을 평생토록 지키려고 노력했다. 때문에 그녀는 젊은 장군 장개석이 망부의 유지인 국공합작을 통한 중국의 통일과 대일항전을 포기했다고 주장하며 그에게 맹렬히 반발했다.
국민당 좌파의 지도자로 장총통의 정책을 신랄하게 반대해온 그녀는 27년 총통과 동생의 혼인을 한사코 반대했었다. 그녀는 미령과 총통의 혼인으로 가족들과 절연했는데 그후 30년대말과 40년대의 소강상태를 제의하고 이 관계는 끝까지 지속됐다.
27년 제1차 국공합작이 깨지고나자 모스크바로 갔으나 공산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2년간 주로 독일에서 보낸후 귀국한 그녀는 때로는 공산당의 자금을 모금하기도 했고 때로는 전쟁부상병이나 아동구호의 일선에 나서기도 했다.
36년 장총통이 서안에서 청년원수 장학량에게 구금돼 그 명이 경각에 달렸을때 그녀는 상해에서 장총통을 살리라는 「스탈린」의 지시를 연안의 모택동에게 전해 장총통의 목숨을 구하는데 일조를 하기도 했다.
49년 중공건국이후 중공에 남아 59년 국가부주석에 선출되었고 68년이후 한때는 국가주석직을 대행하기도 했지만 중공치하에서 그녀의 역할은 언제나 여러 정파의 화해와 협조를 꾀하고 얻으려는 중공의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수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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