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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100년 전 하수관 아무도 몰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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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강기헌 기자 중앙일보 기자
2012년 남대문로와 서울광장 지하에서 발견된 100년 전 하수관 위치(붉은색). [자료 서울시]
강기헌
사회부문 기자

2012년 9월. 서울 중구 남대문로 하수관 정비 공사 현장에서 1910년 만들어진 하수관이 발견됐다. 지름 1.8m로 성인 한 사람이 허리를 펴고 다니기에 충분한 규모였다. 발굴에 나선 서울시는 벽돌식 하수관(길이 461.3m)과 돌을 쌓아 만든 석축식 하수관(27.3m)이 남대문로를 따라 지하에 묻혀 있음을 확인했다. 하수관을 둘러싼 적벽돌 일부는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하루 차량 통행량이 수십 만대에 이르는 상습정체 도로의 지하에서 대형 하수관을 발견한 시청 관계자들은 깜짝 놀랐다. 시는 대대적인 조사를 실시해 서울광장 밑에서도 190.9m에 달하는 하수관을 확인했다. 100년 넘게 묻혀 있었지만 아무도 몰랐던 하수관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지난해 5월 시는 이 같은 사실을 공개하며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국내 최초로 문화재로 지정되는 지하 시설물이자 하수도 시설물이 될 것이다.” “근대 하수도 기술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으로 한국 토목기술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지하 공간에 대한 서울시의 무지(無知)는 화려한 홍보 문구 사이에 가려졌다. 하수관은 지난 7월 시 기념물 로 지정됐다.

 하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다. 서울시, 나아가 한국 사회의 지하 공간에 대한 무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지하에 어떤 시설물이 얼마나 묻혀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도, 정보도 없다는 방증이다. 특히 개발 붐이 불기 시작한 70년대 이전에 대해선 백지에 가깝다.

 지난달 송파구 석촌지하차도 밑에서 발견된 길이 80m의 거대 동공(洞空·텅 빈 굴)은 남대문로 하수관과 닮은꼴이다. 남대문로 하수관이 정비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것처럼 석촌지하차도 동공 역시 싱크홀 원인 조사 과정에서 ‘운 좋게’ 발견했다. 청계천 복개 공사(1958년) 이후 방치돼온 것으로 추정되는 남대문로 하수관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도로 붕괴 등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석촌지하차도도 다르지 않다.

 패닉(공포)은 불투명성과 돌연성에서 온다. 지하공간을 들여다볼 수 있는 땅속 지도와 사용 내역서, 즉 지하 족보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40년 넘게 이어진 난개발로 무시돼온 지하 공간 안전 문제를 운(運)에만 맡겨둘 순 없다. 지난 4년간 서울시에서 발생한 싱크홀(가로 2m, 세로 2m 이상) 14건 중 원인불명(3건) 사례를 제외하면 대부분 상·하수도관 누수가 원인이었다. 전문가들은 꾸준한 관리를 강조한다. 서울대 정충기(건설환경공학부) 교수는 “ 지도는 정확성과 지속적인 유지 관리가 생명인데 땅속지도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말한다. 지하 공간에 대한 컨트롤타워는 반드시 구축돼야 한다.

강기헌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