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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열번 째 시집『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서정시의 본령"

중앙일보

입력

시인 이재무(56)씨가 열 번째 시집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실천문학사)를 펴냈다. 1983년 민중적 삶에 밀착한 생활문학 운동을 표방한 동인지 ‘삶의 문학’으로 등단한 지 31년만, 2011년 아홉 번째 시집인 『경쾌한 유랑』 이후 3년 만이다.

‘시는 내 생활의 기록이다. 내 시편들은 생활 속에서 발견한 것들이다.’
시집 뒷편 ‘시인의 말’이나, 공광규 시인의 추천글(‘생활감정과 일상 사물, 사회의식을 서정화하는 언술 능력이 탁월한 시’)이 전하는 것처럼 주로 일상에서 길어 올린 따뜻하면서 애틋한 서정시 60여 편이 실려 있다.

평론가 권성우씨는 이씨를 두고 김사인·나희덕·문태준·김선우 등과 함께 ‘서정시의 본령을 굳건히 수호하는 드문 시인’으로 분류한다. 의미가 난삽하지 않고 명료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시집 어디를 펼쳐도 좋지만 가령 ‘가난한 평등’이 그런 시다.
‘국밥 속에 든 비계처럼//탕 속 둥둥 떠 있는 허여멀건 육체들//맺혔다가는 스스로의 무게 못 이겨//떨어지기를 거듭 반복하는 벽면의 물방울들//말없이, 느긋하게 응시하는 저 다양한 체위 속에는//기실 얼마나 많은 소음들이 들어차 있을 것인가//음치가 있고 기계치가 있듯 몸치가 있다//평일 한낮 황토방 마주보거나 나란히 앉아//육즙 짜내며 힐긋힐긋, 울퉁불퉁한 서로의//가난한 평등 훔쳐보는 비만의 자루 속에는//발기불능의 욕망들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것이다’.

평일 낮에 황토방이나 온탕의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는 허여멀건 몸피의 중년 사내들. 그들이 반드시 생존경쟁의 수세에 몰린 약자들인 것은 아니다. 저렴한 균일가 입욕료를 내고 대중탕에 들어왔다는 점에서 평등하게 가난한 자들이지만 기실 그들의 내면은 실현되지 못한 욕망, 몸부림에 가까운 몸짓과 소음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중산층 혹은 서민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우리들 대부분의 자화상이다.

‘냉장고에 대하여’는 역시 생활시이지만 문명비판적인 가파른 생태의식을 내장하고 있다. ‘다국적 죽음들이 수시로 드나드는//냉장고 층층마다 시체들이 누워 있다//사체로 끼니를 챙겨 먹고//인간들은 조금 더 죽음을 연장한다’. 운동능력을 갖춘 동물이라기보다 갖가지 요리 재료로 쓰일 뿐인 닭의 운명을 그린 ‘폐닭’도 비슷한 계열이다.
‘지병처럼 찾아오는 것들’, ‘달을 안주로 술을 마시다’는 질펀한 해학 코드가 돋보인다.

서정시의 본령을 다르게 표현하면, 대상에의 감정이입을 통한 하나 됨에서 얻어지는 공감일 것이다. 이씨의 시편도 마찬가지다. 대상은 어쩌면 시인의 세계관, 인생철학을 풀어내는 캔버스 같은 것이다.

‘어긋난 사랑 엇도는 관계를 저렇게도//아프고 무력하게 말하는 것들이 있다//한파가 맺어준 단단한 결속을 저렇게도//한순간에 허무는 것들이 있다//둥둥 물살에 휩쓸려 떠다니면서//한 몸으로 살았던 어제를 잊고//서로를 불신하며 밀어내고 있는 것들이 있다//쩌렁쩌렁 겨울 천하를 호령하던 이력 지우고//흐르는 세월에 재빠르게 순응하는 것들이 있다”.

‘유빙들’이라는 제목의 시는 말 그대로 유빙에서, 사람에 대한 믿음을 쉽게 저버리는 변덕스런 시속(時俗)을 읽어낸 작품이다.
수십 년씩 시를 쓴 시인의 세계는 기왕에 추구해온 시의 궤적과 함께 변화를 추구하는 충동에도 주의하며 읽어야 할 것이다. 평론가 권성우씨는 이번 시집에서 섬세한 변화의 징후가 느껴진다고 했다. 시인의 순정이 보상 받아 세상이 차츰 좋아지리라는 기대, 그 기대가 이뤄지기 어렵다는 각성에서 오는 성숙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표제시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도 그런 시각에서 읽을 때 울림이 깊다.
‘어항 속 물을//물로 씻어내듯이//슬픔을 슬픔으로//문질러 닦는다//슬픔은 생활의 아버지//무릎을 꿇고//두 손 모아 고개 조아려//지혜를 경청한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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