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호랑이 굴에 들어앉은 억척 상 비혼|뉴욕 흑인가의 한국상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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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뉴욕의 할렘은 황폐한 대도시 빈민가의 대명사다. 맨해턴섬 북쪽 110번가에서 168번가에 이르는 할렘은 저소득 흑인들의 밀집지역. 까딱 잘못 들었다간 대낮에도 변을 당하기 십상이다. 호기심 많은 백인들은 물론, 같은 흑인들마저도 대단한 각오 없이는 들어가길 주저하는 곳이다.
그런 할렘의 중심부에 몇 년 전부터 한국인들이 가게를 차리기 시작해 이제는 제법 상가를 이뤄 짭짤한 재미를 보고있다. 할렘에서도 가장 위험마는 16번가의 스패니시할렘과 125번가의 블랙할렘일대에 각각 30여 군데가 넘는 한국인 상점이 들어서『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람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우리 속담을 실증하고 있다.

<지역사업도 벌여>
억척같은 한국인들이 할렘에서 재미를 보고있다는 소문은 어지간히 나있다. 지난 5월초 미국 CBS-TV는 화재의 인물을 소개하는「피플」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할렘의 한국인상가를 소개했다. 2월초에 방영된 프로그램이 어떤 의도에서인지는 몰라도 이례적으로 재방영됐다.
CBS의 기자는 어떤 가게주인에게 흑인 동네에서 돈을 벌어 백인 동네에서 살고있다고 시비를 걸었다가『당신은 방송국에서 살림을 하느냐』는 역습을 받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가볍게 넘길 수만은 없다. 미국에서 정착하기 위해 밤낮으로 뛰고있는 한국인들을 가로막는 텃세일수도 있고, 성공에 대한 시샘일수도 있다.
그런 텃세와 시샘은 한국인들이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날수록 더 심해질 것이 틀림없다.
흑인주민들의 감정을 간파한 125번가 일대의 한국인들은 지난 3월 할렘상인번영회 (회장 김원덕·46)를 조직했다. 설립취지는 회원상호간의 공동이익을 보호하고 할렘의 발전을 돕는 지역사업을 편다는 것.
번영회에 속한 한국인상점은 모두 33개소로 그중 의류가게가 가장 많고(12개소), 어물전 6개, 야채가게 5개, 가발상점 4개, 잡화와 보석상점이 각 3개소다.

<하루가 아슬아슬>
회장 김씨는『흑인을 상대로 일확천금을 하겠다는 과욕을 버리고, 긴 눈으로 봐서 흑인사회와의 유대강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유대를 돈독히 하기 위해선 할렘에서 번 돈의 일부는 할렘에서 써야한다는 것이 김씨의 주장이다.
그는 흑인어린이들을 위한 롤러스케이트장을 마련해줄 구상을 하고있다.
할렘의 한국인상가의 역사는 길지 않다. 지난 74년「솔가이」란 간판을 걸고 남자 옷가게를 차린 정인욱 씨를 효시로 하여 2년 사이에 김씨의「가이·앤드·갤」과 김세성 씨(40)의「솔·트레인·스테이션」이란 의류점이 들어섰다.
이들은 3년 이상 할렘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최근 1∼2년새 한국인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요즘에도 가게를 물색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워낙 시장이 넓어서 아직은 피차 손해보는 과당경쟁문제는 심각하지 않지만, 불씨는 내재돼있다.
할렘의 상인들은 하루를 살얼음 딛듯 한다. 다행하게도 큰 변을 당한 사람은 없지만, 한달에 한두 번 꼴로 흉기강도에게 털리고 있다. 또 미국에서 계속 되고 있는 불경기와「레이건」행정부의 복지정책의 축소 때문에 흑인들의 씀씀이가 전만 하지 못하다.

<할렘은 모계사회>
할렘에서 가장 성공한 것으로 알려진 김세성 씨의 경험은 시장연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김씨는 명문 K고교, 서울대 공대 기계과를 졸업하고 W산업 무역부에서 근무하다가 지난 76년에 이민했다. 김씨가 할렘에 들어가기로 작정한 것은 가게임대료가 싼 데다가, 경쟁이 심하지 않고, 또 흑인들의 충동구매 행태를 염두에 두고서였다.
40여만 명이 밀집한 할렘은 모계사회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미혼모가 출산할 경우, 복지기금으로 우유와 기저귀는 물론 산모의 생활비까지 지급되기 때문에 여자의 발언권이 세어지게 마련이다. 반면에 남자들은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여자에게 빌 붙어사는 경우가 많다. 복지기금에서 얻는 공돈을 헤프게 쓰게 마련이다.
김씨는 낡은 가게를 세내어 수리를 하고 입구에 큰 쇼윈도를 만들었다. 흑인들이 많이 보는 신문 뉴욕데일리지의 글자체를 본떠「솔·트레인·스테이션」이란 간판을 걸고, 흑인이 가장 좋아하는 술과 디스코음악을 틀었다.

<유대인도 손든 곳>
양말에서 모자에 이르기까지 구색을 갖춰 개점했다.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들면서 쇼윈도를 들여다보던 흑인들은 한번 마음에 들었다하면 가진 돈을 몽땅 털어 버리고 만다. 개점 첫날 매상이 현재의 기준매상일 만큼 손님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김씨는 강도에 대비하여 강도보험에 들고 가게와 창고에 전자감시장치를 설치하는 대신 호신용 권총은 갖지 않고 있다. 김씨는 총을 가졌기 때문에 불행한 일을 당할 위험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들어 강도보험에만 들었다고 했다.
CBS방송이 지적했듯이 지독한 유대인들도 손들고 나간 할렘의 폐허에 한국인들이 들어가 할렘의 검은 모습을 서서히 바꾸어가고 있다.
사진 장홍근 기자
글 김재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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