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든 한복이든 욕망 자극 패션은 뜬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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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본 최고의 공연을 꼽으라면 단연 뮤지션 정재일과 소리꾼 한승석이 펼친 무대다. 바리공주의 설화를 모티브로 한 ‘바리 abandoned’라는 타이틀을 단 공연은 천재 피아니스트 정씨와 판소리의 대가 한씨가 2년여 준비 끝에 완성한 걸작. 처음엔 그저 동서양 음악이 만나는 퓨전 국악이겠거니 싶었지만 상상 그 이상이었다. 신들린 듯한 건반 연주와 절제되지만 호소력 있는 음색이 주거니받거니, 드라마틱하게 긴장을 이어가는 묘한 만남이 이뤄졌다. 이를 크로스 오버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해서, 그건 그냥 어디에도 없던 새로운 장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국악이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이구나’라는 것도 새삼 실감했다. 전석 매진이라는 흥행은 물론이거니와 공연 뒤 이어진 환호와 기립 박수를 생각해 보면 혼자만의 찬사가 아님을 증명한다.

이 비슷한 감흥을 최근 패션계에서도 연이어 발견하고 있다.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 노앙이 선보인 티셔츠가 그 하나다. 디자이너가 배우 유아인과 협업해 만들었다는 티셔츠는 누구나 처음 보면 무릎을 칠 만하다. 가슴팍과 등판에 도시 이름을 찍은 건 꽤 익숙한 디자인. 하지만 그 모양이 좀 특이해서다. 한글과 영문을 조합해 서울은 ‘ㅅEOUL’, 파리는 ‘PAㄹIS’ 식으로 기발한 표기법을 사용했는데, 한 자씩 읽으면서 슬쩍 미소를 짓게 하는 위트다. 보는 이마다 비슷한 매력을 느낀 것인지 이 티셔츠는 한 백화점 팝업스토어에서 연일 완판되며 2억 원의 매출을 달성했고, 올 최고의 ‘국민 티셔츠’로 불리기도 했다. 지금껏 한글을 응용한 디자인이라고 하면 국가를 상징하는 홍보물 내지는 ‘한국적’이라는 꼬리표를 다는 제작 의도가 분명했던 바, 소비자의 관심과 호응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 분명하다.

이뿐 아니다. 한복에서도 눈길을 끄는 트렌드가 있다. 일명 ‘철릭 원피스’의 유행이다. ‘철릭’이란 고려말부터 조선까지 무관이 주로 입던 일종의 포. 저고리와 치마가 분리되며 치마 쪽에 잔주름이 잡혀 있는 것이 특징인 이 전통 한복을 ‘차이킴’의 김영진 디자이너는 가슴 아래부터 퍼지는 단아한 원피스로 새롭게 고안했다. 여밈을 풀어 헤치면 가벼운 롱재킷으로, 원피스 위에 모시 치마를 덧입으면 풍성한 드레스로 바뀌는 스타일링을 연출할 수도 있다. 혼수·돌 말고는 딱히 특수라고 할 게 없는 한복 시장에서 지난 석 달 새 300여 벌이 팔렸다는데, 이런 인기 때문인지 최근엔 비슷한 디자인의 철릭 원피스가 다른 브랜드에서도 판매되고 있다. 김씨는 “특히 20대 젊은 여성들이 철릭 원피스에 대해 한복에 대한 거부감은커녕 해외여행에서 입고 찍은 사진을 보내올 때 놀랍고 뿌듯하다”고 말했다.

한글 디자인이든 한복이든 모두가 우리의 소중한 전통 문화 유산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그런데 지금껏 희한하게도 가까이하고자하면 더 멀어지기만 했다. 자주 접하지 않으니 잘 모르겠고, 모르니까 재미없고, 재미없으니 더 안 찾게 되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국경일이나 명절 때나 한 번쯤 다루게 되는 ‘달력 기사’ 아이템이 됐다. 그때마다 우리 것을 지키고 사랑하자는 교훈과 계도의 메시지가 함께했다.

허나 이것이 최선의 해법은 아닐 터다. 멋지게, 재미있게, 아름답게 만드는 것. 그래서 지갑을 열고 갖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하는 게 순리라는 생각이다. 남들 입은 게 괜찮아보이니 나도 한 번 따라 입고 싶고, 동시대적 감각을 그대로 보여주는 옷이라면 거기에 전통이라는 의미는 굳이 보탤 이유가 없다. 옛 것이라서, 우리 것이라서가 아니라 일단 예쁘지 않다면 외면받는 게 당연하다. 패션은 계몽이 아닌 욕망으로 승부하는 냉정한 세계 아닌가. 신개념 한글 티셔츠와 철릭 원피스의 흥행은 이를 신랄하게 증명해 보이고 있다.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노앙·차이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