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로 돌변한「이기」|공습 지난 전쟁터 같은 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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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엄청난 비극의 현장에 48시간을 살았던 취재기자들로부터 신문에 나지 않았던 사고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어본다.
언제나 대형사고의 뒤에는 사건이 주는 교훈이 남게 마련이지만 이번 사고를 통해 취재기자들은 수많은 인명을 책임지고있는 사람들의 위기에 대처하는 강도 높은 대응력·조직력·판단력의 함양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사고 첫 소식을 입수한 게 14일 하오 4시50분쯤이었지요. 제1보는 대구에 있는 독자가 시외전화로 알려왔고 거의 동시에 치안본부에서 대형열차사고가 대구근교에서 일어났는데 자세한 상황이 안 들어온다는 연락이 출입기자한데서 들어왔어요.
-그 시간에 편집국은 교황피격사건으로 한바탕북새통을 떨고 면 정부의 바뀐 쌍동이 문제가 양부모들의 합의로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으며 때 마침 대통령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 준결승전이 중계되고 있어 부산하고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지요.
그분위기가 순식간에 비상체재로 돌변했습니다. 이날 따라 교황피격사건에 사건발생 연속이었습니다.
-이런 경우 지방주재기자가 없는 게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은 급하고 현지에 확인할 길이 있어야지요. TV화면에『1백여 명 사상』이란 자막이 나오자「엄청난 참사」라는 경험상의 촉각이 살아나더군요.
-우리 팀이 현지에 출동한 게 몇 시쯤이지요?
-시경출입기자를 비롯, 전사건 기자들이 집결한 게 하오5시20분쯤이었고 팀을 짜서 현지로 출발한 게 5시40분쯤이었습니다.
-사건 현장에 도착하니 밤9시40분으로 4시간만에 대구까지 주파한 셈이지요.
-「이동사회부」취재팀이었던 이창우·장남량 기자들은 이날 하오6시쯤 광주에서 사고소식을 듣고 본사에 연락,『현지로 가라』는 데스크 지시로 그대로 전남지방을 지나 구마고속도로로 질주, 본사취재팀과 거의 동시에 사고현장에 도착했지요.
-길도 어두운 밤중에 달리는 게 아니라 나는 셈이었습니다. 아찔아찔하더군요.
-취재기자가 없어 당황했던 것은 현지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초동취재가 없이 칠흑 같은 밤중에 현장에 도착하고 보니 어디서부터 손을 데야할지 막막했습니다.
-사고자체가 워낙 엄청나고 현장 또한 넓었으니까요.
-사고발생5시간 가까이 지난 뒤에 현장에 갔기 때문에 우선 처음의 아수라장은 다소 진정되어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들판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들리고 역겨운 피비린내가 처참했던 사고를 대변하더군요.
-어둠이 눈에 익으면서 나뒹군 객차로 접근 플래시를 비추면서 들어가는데 무엇인가 슬쩍 스쳐 자세히 보니 철골사이에 끼여있던 사망자의 팔뚝이더군요.
-제가 가본 객차는 7호 차인데 아코디온처럼 구겨진 철판사이에 시체2구가 처참한 모습으로 끼여있었어요. 이밖에도 떨어져나간 살점·옷가지·소지품 등이 마치 공습이 지나간 전쟁터 같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좌우간 무쇠덩이가 그렇게 종잇장처럼 찢어지고 구겨질 수 있는가하고 우리들 눈이 의심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니까 8,9호 객차는 충돌순간 하늘로 치솟았다가 떨어져나갔고 보통급행기관차가 7호 차를 파고들면서 아코디온처럼 만들어놓는 순간. 그 충격으로 보급열차의 1호 객차는 기관차위로 올라탔더군요.
-이런 사고가 나자 인근 대구시는 시내의 각급 기관이 모두 즉각 비상체제로 들어갔고 특히 시내 전 병원은 의사·간호원 등 의료진을 총 동원하는 등 그런 대로 부상자 치료에는 별다른 차질을 빚지 않았던 게 다행이었죠.
-파티마 병원에서 만난 30대 여자승객은 자신도 중상을 입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수라장 속에서 잃어버렸던 2살 짜리 외아들을 찾아 온 시내 병원을 뒤지는 것을 보니 짙은 모성애를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경북대 의대병원에서는 엄마와 떨어진 젖먹이가 자정이 넘어서까지도 엄마를 찾지 못한 채 머리에 링게르를 꽂고 울어 다른 부상여인 젖을 물리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들이받은 보급열차는 3분의1정도가 짓이겨졌는데 기관사 박이종씨가 살아났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봐야겠죠.
-그래서 경찰이나 취재진이나 모두 박씨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놀랄 정도였으니까요.
-박씨의 집에서는 빈소까지 자려 놓았다더군요.
-박씨는 오른쪽 다리의 근육이 파열되고 오른쪽 괄목과 이마에 타박상 정도의 부상으로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어 의사들도 박씨가 보급열차의 기관사인줄 알고는 놀라더군요.
-특급열차 제일 끝 승강구에서 후진신호를 해주던 여객전무 김암우씨가 아무런 상처 없이 살아 난데 대해 현지 경찰이나 취재진 사이에서는「6백만 불의 사나이」란 별명이 붙여졌죠.
-우리는 대책본부에서 2백여m 떨어진 여관을 임시숙소로 정했는데 밤낮 할 것 없이 뛰어들어오고 뛰어나가고 기사 쓰랴 송고 하랴 법석을 떨고, 전화는 잡았다하면 1시간이 넘게 쓰기가 일쑤여서 처음에는 이해를 하던 여관주인도 나중엔『낮 손님이 끊어졌다』며 짜증을 내더군요.
-워낙 사고가 초대형이라 그랬겠지만 대책본부는 사고 다음날인 l5일까지도 우왕좌왕 정신을 못 차렸어요.
-동대구 역 대책본부라는 것조차3군데로 나누어져 가까운데 살고있는 사망자·부상자 가족들아 몰려가 확인을 하려해도 책임 있는 답변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취재팀이 물어도 답변이 서로 다르기도 했지요.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이 현지에 내려와 사상자 보상·치료, 피해복구 등의 지시가 있고 나서야 체계가 잡혀지고 대책본부의 활동도 적극적이더군요.
-아뭏든 이런 사고가 다시는 없어야겠죠. 4년 전 취재했던 지탄역 열차사고의 악몽이 되살아나더군요.
-그때 우리가 지적했듯이 이번에 또 한번 문명의 이기란 그것을 다루는 인간이 지켜야 할 수칙을 제대로 지켜주었을 때이기이지 그렇지 못할 경우 언제라도 흉기로 돌변한다는 것을 새삼 뼈저리게 느낀 셈입니다.
-이번 사고에서 느낀 점은 지난번 KAL기 화재사고 때 승무원들이 보여준 조직적이고 고도화된 비상사태 적응력과 비교하면 이런 사태를 맞았을 때 대처하는 강도(강도)나 능력이 우리 철도기관사들에게는 다소 부족한 듯 합니다.
-그래요. 단추를 누르면 가고 키를 당기면 서는 단순한 기능인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할 것 같습니다. 최소한의 소양을 갖추어야겠죠.
-그 소양이란 자신이 수백 수천의 인명을 수송하고, 그 수송 체가 현대과학문명이 집약된 것이며, 현대생활이 언제 어떠한 비상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인 만큼 항상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적응력이 몸에 배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급열차 기관사 문씨의 경우 오토바이를 받은 후 당황하였겠지만 곧 뒤따라올 더 큰 위험을 직감하고 이에 대처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갖추었어야 했다고 봅니다.
-현재 경부선의 레일잼이며 선로에 곡선부분이 많다는 것 등은 개선되어야겠지만 이러한「위험한 이기」를 다루는 사람들에 대한평소의 훈련·소양은 꾸준히 쌓아져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사고가 일어난 뒤에는 하는 이야기지만 사망자 보상·부상자치료·피해복구비 및 이 밖의 손실 등을 합치면 4백억 원 가까운 경제적 손실이 있다고 봅니다. 이 손실액의 10분의1만이라도 철도종사자들의 교육·복지 및 시설투자에 썼다면 이처럼 잦은 대형철도사고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숫자풀이마저 나오더군요.
-하룻밤사이에 서울∼대구를 뛰느라 얼굴들이 말이 아니군요.
-우리들고생이야 희생자가족들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시는 그런 참사가 없어야겠습니다.

<참석자>
사회부
▲오홍근 차장
▲이창우 기자
▲한간수 기자
▲이창호 기자
▲정순균 기자
사진부
▲김주만 기자
▲장남원 기자
▲이호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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