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장미를 <나의 꽃>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간절히 원했으되 <나의 사람>이 될 수 없었던 어떤 만남같이 장미의 화려극치도 무한한 목마름의 어느 위치에 서 있게 할 뿐 근접이 쉽지 않았다.
촉광이 과할 때 오히려 눈을 돌리게 되둣이 장미 역시 내 마음을 열기엔 자의식의 초라함이 감당못할 눈부심을 타곤했다.
그러면서 이 꽃과 자주 만났다.
선물로 받은 백장미 한 다발, 초대받은 식탁에 막 이슬을 털어낸 듯 꽂혀있거나 어느 땐 환한 촛불처럼 가슴에 달아주는 형편도 생긴다.
그러나 장미와 나의 진정히 깊은 만남은 꽃의 명시들을 통해서였다.
시에서는 장미가 꽃의 영역을 넘어서서 한 성숙한 사상으로 영글게 되었으며 꽃의 순례자들은 거의가 장미앞에 이르러 여정을 그치는 것 같았다.
수면에 비추이는 나무나 구름들처럼 시 속에 읊어진 간접의 장미를 바라보면서 내 좌석은 비로소 편안했고 장미의 내면, 어쩌면 그 심연이라고 할 수심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한송이의 장미
그것은 모든 장미이다.
그리고 그 이상이다.>
장미의 시인 「릴케」는 장미가시에 찔린 상처의 악화로 죽었으며 유언을 통해 당부한 그 자신의 묘비명도 <장미, 오오 순수한 모순이어(하략)>이던 사실을 모르는 이가 드물 정도다.
은수자들이 돌을 갈듯이 시인들은 장미의 정혼을 불러내려 애썼으나 그 신비는 훨씬 더 무궁할 듯 싶다.
장미의 진미는 단지 5분간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 전후의 시간들은 미의 정점을 쌓아 올리는 시간과 그 정점을 허물어내리는 시간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한데 여기에 나의 이론이 있다.
진정히 아름다운 것은 시종이 동일한 밀도의 진미일 뿐이고 그와같이 사람의 삶도 능력의 전부를 꽃피우고 은총의 조명을 받는 한에서는 전생의 매일매시가 절대의 의미를 완성한다고 나는 믿는다.
시드는 꽃 앞의 그 숙연감.
개화 이전의 꽃의 보배스러움.
내게 있어 장미는 영영 줄어들지 않는 목마름이오, 언제까지나 젊디젊은 갈망이다. 그 아득한 연륜의 부피에 이르러 장미는 내 마음의 중심에 생금빛 씨앗 하나를 심어주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