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5)인플레의 고속행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기억을 더듬어 11년 전(70년) 봄으로 돌아가 보자.
그 때는 가정주부의 시장바구니에 2천원만 있어도 푸짐하게 장을 볼 수 있었다.
쌀 한말(상품 8kg) 5백90원, 계란 한 꾸러미 1백30원, 쇠고기 한근 4백50원, 그리고 한가족의 식탁을 채울 생선과 과일을 쇼핑하고도 약간 남았다.
지금은 2천원 갖고는 쌀 반말도 사지 못한다. 1천3백원이 더 있어야한다.
샐러리맨이 그 당시 호주머니에 3천원만 있으면 퇴근길 어깨를 펼 수 있었다. 친구를 청해 술 한잔하자며 호기도 부릴 수 있었다.
맥주 한 병 2백원, 곰탕 한 그릇 1백20원, 1류 극장의 영화관람료래야 보통 3백원, 택시비는 기본 60원에 가산료가 10원씩이었다.
그러니까 토요일 오후 둘이 만나 영화구경을 한 다음 저녁식사를 청해 맥주한잔씩 나누고 택시로 집에 돌아가도 3천원이면 족했다.
지금은 어림도 없는 얘기다. 일상생활용품에 관한 한 돈의 구매력은 11년 전에 비해 10분의1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성싶다.
정부가 발표하는 공식 물가(소비자) 상승률은 그사이 4·5배 오른 것으로 되어있다.
어느 나라나 정부의 물가통계와 실제생활물가 사이에는 괴리가 있긴 하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 더 거리감을 느낀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면 소득의 증가추세는 어떤가.
경제기획원이 조사 발표하는 도시인 가구의 연간평균소득 (명목) 은 38만1천2백40원에서 작년에는 3백20만5천1백52원으로 오른 것으로 되어있다.
8배 남짓 증가한 셈이다.
소득이 늘어나긴 했지만 높은 인플레로 그 대부분은 잠식돼 버렸다.
그 때나 지금이나 『쪼들림』을 못 벗어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특히 작년의 경우는 명목소득의 증가가 물가 상승율을 못 따라 갔기 때문에 실질적인 소득은 오히려 줄었다.
건국이후 지금까지 33년간 우리 나라의 돈 가치는 곤두박질치며 떨어져왔다. 67년만 해도 한국 돈 1만원은 일본 돈 1만 엔보다 가치가 있었으나 지금은 3분의1정도다.
어느 나라나 세월이 갈수록 돈 가치는 떨어지게 마련이지만 우리는 너무 심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48년8월 쌀 한 가마 값은 12원40전(당시 돈으로 1만2천40원)이었다. 지금은 5만8천원. 4천6백77배가 올랐다.
한 돈쭝 5원80전 했던 금값은 4만9천원으로 8천4백50배.
서울소비자물가지수는 48년 대비 작년 말 현재 2천5백68배 오른 것으로 되어있다.
돈의 표면가치자체가 두 차례의 화폐 개혁을 통해 1천분의1로 절하됐다.
이 같은 물가추세는 건국이후의 경제사가 인플레의 고속행진 사로 엮어 졌음을 말해준다.
인플레행진의 또 다른 증거는 권종별 화폐발행고에서도 볼 수 있다.
지난 71년에는 5백원 짜리가 최고액권이었다. 72년에 5천원권이 나왔고 73년부터 1만원 짜리가 선을 보였다.
그야말로 고액권의 권위가 있었다. 그러다가 5천원·1만원 짜리가 점점 많아지더니 지금은 전채 화폐발행본의 약70%를 차지, 가장 흔한 돈으로 돼버렸다.
우리 나라의 인플레 사는 50년대까지만 해도 해방직후의 혼란과 6·25전쟁 등 경제외적인 영향이 컸다.
그러나 60년대 이후는 부가 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정부정책의 부산물로 봐야한다.
의욕적인 성장목표를 정해놓고 광대 일로의 정책을 썼다.
그에 따른 막대한 투자재원을 인플레적 방법에 의존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통화를 증발해서 그것으로 재원을 마련했다.
해마다 포화공급이 40%안팎씩 늘어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6l년 말 현재 1백81억 원이던 화폐발행 액은 작년 말 현재 2조3배85억원으로 약1백13배, 4백13억 원이었던 총통화는 12조5천3백45억원으로 3백3배 가량 늘어났다.
그사이 실질 총GNP(국민소득)는 3조46억원(75년 불변가격)에서 13조9천2백13억원으로 4·6배가 증가했다.
실질GNP성장률과 통화공급 증가율간의 갭은 바로 인플레로 나타난 것이다.
인플레는 통화공급증가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원인은 석유 값 인상과 같은 코스트푸시가 주도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 나라는 지금까지 늘 초과유동성의 상태가 지속되어 왔다.
30여 년 고질인 인플레 법은 그래서 치유될 겨를이 없었다.
특히 지난 77년 중동 달러가 쏟아져 들어올 때 그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상 미증유의 환물 투기바람을 일으킨 것은 정부의 큰 실책으로 기록되고있다.
77∼78년 2년간 휩쓴 투기바람은 인플레 심리를 결정적으로 불질러놨다.
뒤늦게 인플레 불길을 잡아보겠다고 지난 79년 모처럼 긴축정책을 실시했으나 불황국면에 부딪쳐 1년을 지탱하지 못했다.
인플레는 당장 들뜨게 하는 환각작용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곧 저소득층의 부를 뺏어가 버리고 사회의 중산층을 몰락시킨다. 부의 불편 등 배분을 심화시킨다.
그리고 끝내는 성장의 잠재력마저 집어삼키고 만다. 그래서 인플레는 인류역사이래 가장 무서운 『공적 제1호』의 낙인이 찍힌 것이다. 【이제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