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4)제73화 증권시장(4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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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합집산 연합전선>
증권금융주 매수 측 4자 연합전선이 형성되면서 만들어진 계약서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시 증권금융회사 자본금은 5억원이었는데 최소한 50%이상을 사나가고 최악의 경우에는 발행주식 전부를 사되 4자가 공동으로 부담한다.
손익이 생기면 이 또한 공동으로 부담한다. 대체로 이러한 내용이었다.
필자가 여기서 그 내용을 밝히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그 내용에 대해 구구한 억측이 많았기 때문이다.
계약서 작성에 직접 관여했던 한 사람으로 그 내용을 그대로 밝히고자 하는 것이며 누구의 잘잘못을 얘기하고자 할 뜻은 추호도 없다.
4자의 매수작전은 착실히 진행됐다.
70년 말에 1천원 선으로 올라섰던 증금주가는 71년2월1일에는 1천8백29원을 기록했다.
책동전은 격화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거래소는 증금주의 전건옥에 대해서 증거금을 늘리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나 매수 측이 법원에 신청한 효력정지가처분신청이 수리됨으로써 원상대로 돌아갔다.
당시 신규 매매 분에 대한 증증거금 부과는 있을 수 있었으나 기보매 된 전건옥에 대해서까지 적용시킨다는 것은 지나친 일이었다.
이때 한양 측은 상당히 자금 압박을 받았다. 총 발행주식이 1백만 주에 불과한데 50여만 주를 공매도한 상태에서 주가가 계속 오르자 자금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다급해진 한양은 김동만씨(당시 해동화재사장)의 사위가 경영하는 금성증권을 매도 측에 끌어들였다.
이렇게 매도세가 강화되어가자 공매도 숫자는 더욱 늘어갔다.
그러나 매수 측은 실물을 확보하는 전략으로 나갔기 때문에 증금주가는 계속 치솟았다.
증금주를 둘러싼 상황이 점점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게되자 정부는 책동전을 매듭짓는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투자공사 김홍경 총재에게 중재임무가 주어졌다.
협상은 71년7월초부터 시작됐다. 물론 필자도 몇 차례 김 총재를 만났다.
승리의 고지를 눈앞에 두고있는 매수 측으로서는 솔직히 말해 협상이 달갑지 앓았다. 또한 김 총재가 제시한 협상안(가격)이 합당한 것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나만의 이익」을 내세울 수는 없었다.
만의 하나 파동으로라도 이어진다면 모처럼 자리가 잡혀가는 증시가 또 다시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 것이 틀림없었다.
매수 측은 장시간 토론 끝에 김 총재가 최종적으로 제시한 정리 방안을 수락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대국적인 입장에서 해옥에 응한 것이다. 이로써 일단의 고비는 넘기는 듯 했다.
그러나 이때 김동만씨계의 금성증권이 다시 대량의 매도를 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해옥한 것은 김성 명의로 된 한양측 소유분이었고 김성 자신의 매도분은 그대로 남아있어 이를 매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이 이쯤 되니 4자 연합인 매수 측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대로 둔다면 주가는 계속 하락하여 해옥에서 입은 막대한 손해에다 크게 혹을 하나 더 붙인 격이 되어 치명상을 입게되기 때문이었다.
연합 팀도 자기방어를 위해 다시 매수작전에 들어갔다.
이 때부터는 공매도의 귀재인 김동만씨가 더욱 적극성을 띠게 됐다. 이 무렵 한양증권은 매도주력의 바탕을 김동만씨에게 슬그머니 넘겨버리고 매수 측으로 돌아섰다.
이 사실을 김동만씨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반면에 매수 연합 팀은 더욱 기세를 올려갔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는 어느 날 김동만씨가 증금주를 무제한으로 팔기 시작했다. 매수측은 물론이고 다른 증권업자 대부분이 나오는 족족 모조리 사들였다.
공매도의 귀재라지만 4자 연합 팀에 한양까지 합세를 했으니 견딜 수가 없었다.
금성증권은 고군분투했으나 역부족(자금고갈)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매도성」의 함락이 눈앞에 왔다고 판단한 매수 측은 책동전의 승전고를 올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 때의 계산상의 이익은 실로 막대한 금액이었다.
그러나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김동만씨가 밤사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수표결제불능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정부나 거래소도 당황했다. 당시 거래소 이사장이었던 김용갑씨가 설득에 나섰으나 매수 측으로서는 굽힐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실물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득을 당해야할 상대는 매도 측이었다. 끝내 시장 내부가 아닌 외부기관에서 증시의 앞날을 위해 개입하는 결과가 빚어졌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필자는 「규칙」에 따라서 정당한 매수 거래를 했으나 이러한 정당성은 모종의 힘 앞에서는 일고의 가치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필자는 필자의 집이 아닌 어떤 곳에서 밤을 새워 해결방안 등 대책을 생각하여 당국에 건의했다.
한편 어느 시장관리책임자의 집에는 많은 증권회사 사장들이 빈번히 오가며 매수 측과는 별다른 상의 한마디 없이 나름대로의 의견을 모아갔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71년8월 중순 이른바 장내정리매매형식으로 책동 전은 막을 내리고 금성증권은 간판을 내리게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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