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9)제73화 증권시장(3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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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증권업계 경영난>
지금까지 자주 써온 「파동」이란 말을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증권시장에서의 파동이란 흔히 시장기능만으로는 수도결제가 불가능하여 강제로 경리·해결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해동화재주 매점사건이나 70년대 초의 증금주 사건을 단순한 책동전으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필자는 다소 견해를 달리 한다.
시장 내부에서 매매쌍방간의 자의에 의한 정리로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파동으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하튼 일단 파동이 끝난 뒷면 으레 피해자 이야기가 많이 나돌았다.
그렇다면 이익을 봤다는 사람이 나와야 할 터인데 그렇지가 않았다.
도박이나 이에 가까운 과당투기와 투매와의 근본적 차이는 무엇일까.
도박이나 투기는 이익 보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손해 보는 사람이 생기게 되는데 반해 투자는 여러 사람이 함께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즉 도박이나 투기는 익과 손이 대립된다는 것이다.
사실상 파동을 몰고 오는 청산거래 하에서의 책동전은 투기로 봐야 한다. 이 경우 손해를 본 사람은 곧 드러나지만 이익을 본 사람은 조용히 숨어버리기 때문에 파동 때면 손해보는 사람만 드러나는 것이다.
크고 작은 파동을 거치면서 졸부가 된 사람이 여럿 있다.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파동은 71년 증금주 파동을 끝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면 파동이 왜 그렇게도 자주 일어나게 됐을까.
당시의 상장회사라야 몇 개 되지가 앓았고 거래종목도 얼마 되지가 않았다. 주거래 종목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라 거래량도 적을 수밖에 없었고 증권관계기관 모두가 경영난에 허덕였다.
당시 증권거래소·증권금융회사·증권회사의 경영책임자들에겐 『어떻게 하면 먹고 살수 있을까』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였다.
투기가 어쨌단 말인가. 증시가 명맥을 유지하기만 한다면 먹고 살수 있는 방법으로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잖겠는가.
지금 생각하면 격세의 감이 있다. 그러나 당시 20∼30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는 의사 책임자가 가장 골머리를 앓는 것이 직원 봉급을 어떻게 거르지 않고 주느냐였다.
매매 수수료만으로 살림을 꾸려가야 하는 증권 거래소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봉급 때만 되면 은행 문턱을 부리나케 들락거리면서 돈을 빌려 오는 것이 월례행사였다.
증금사는 더욱 심했다. 증금사는 당시 빈 껍데기만 남았다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이 아닐 정도였다. 직원을 대폭 줄여 몇 사람 안 됐는데도 몇 달씩이나 월급을 못 주곤 했다.
거래량에 따라 일정률의 회비를 받아 운영하는 협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의 하루 회비는 겨우 3천원 밖에 안 되는 때도 있었다. 봉급을 주지 못해 필자가 개인적으로 빌려준 때도 여러 번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책동전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상장회사의 자본금이 비교적 적고 시장 또한 협소하기 때문에 몇 사람이 단합하여 기억 원만 준비해도 일종의 책동전이 가능했다.
투기나 책동전은 증권회사는 더 말할 나위 없고 거래소조차도 은근히 바랐고 은밀히 조종도 했고 그 길로 끌고도 갔다.
수수료 수입 때문이었다. 책동전이나 책동전의 조종이나 모두가 먹고살기 위한 자기자구 수단이었던 것이다.
장기적 안목으로 증권시장을 내다볼 능력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당장에 수입이 적다보니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책동전에만 눈을 돌렸다.
그리고 60년대만 해도 자본시장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다. 정부당국이나 학계·업계 모두가 소극적이고 부정적이었다. 필자는 이것이 또 하나의 파동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65년 11월19일 제12대 증권거래소 이사장으로 취임한 김영근씨는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뭔가 해보려고 열의가 대단했다.
명동 구 거래소 건물(현 제일투자금융) 맞은편에 있던 구 경찰병원(현 증권빌딩)까지 매입하여 새 거래소 건물을 짓겠다는 구상도 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최준문씨가 통운주를 한창 사들일 때 업무규정 14조2항을 고치게 한 것도 김 이사장이었다.
거래량 증대로 수수료 수입을 늘려 거래소 재정 형편을 펴 나가는데 뜻이 있었던 것 같다. 이때 부국증권 사장 박성일씨는 이사장 방에 뛰어 들어 규정 개정을 항의하며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그것이 거래소 재정문제와 관계가 있었는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으나 아무튼 김 이사장은 매우 적극적인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상장회사 주총에 빠짐없이 참석하여 발언을 많이 하는 사람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총회 때가 되면 이사장실을 드나드는 상장회사 사장들이 많아서,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끝내는 이 문제로 그들 4∼5명과 함께 김 이사장도 기소되어 법정에 서기까지 했다.
60년대의 증권시장은 전반기의 파동과 사건, 후반기의 증권기관 경영난으로 특징지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당시 증권회사나 관계기관의 재정궁핍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길고도 긴 「고난의 터널」을 빠져 나와 오늘을 찾은 동업자들의 인내와 용기에 새삼 경의를 표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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