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긍지갖고 양심껏 일하겠다"|-I미캘리포니아지법 판사로 임명된 장병조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미국법정의 판사가 되더라도 한국인이라는 긍지를 갖고 공부를 더하면서 양심껏 일하겠읍니다. 판사로 임명된 것도 내가 일을 잘해서라기보다는 미국의 한인사회가 커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겠죠.』 한국인 1세 이민자로는 두번째 「캘리포니아」 지방법원의 판사로 임명된 「로스앤젤레스」의 장병조 번호사 (51·미국명「케너드」장)는 찾아간 기자에게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래선지 장씨는 필연적으로 부딪치게 될지도 모르는 한국인과의 관계부터 우려했다.
『한국인교포사회가 커가면서 한인범죄자도 늘고 있어요. 교포들이 흑인강도에게 많이 당하기도 하지만 요즘엔 한국인들이 강도나 살인강간 등의 중범자로 등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읍니다.』
장번호사는 한국인범죄자가 늘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슬픈 일이라고 말했다.
63년부터 번호사를 거쳐 검사로, 다시 변호사로 일해 오면서 수많은 한인사건들을 맡았던 그는 자신의 힘으로도 같은 한인을 도울 수 없었을 때가 가장 안타까왔다고 했다. 장씨는 속상했던 일은 이뿐만이 아니었다고 했다.
『무거운 죄를 저지르는 한인은 그렇다치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다만 언어가 통하지 앉아 억울하게 당하는 일도 많아요. 속도위반으로 교통경찰에 걸렸을 때도 서명만 하고 벌금을 물면 되는 것을 말이 통하지 앓아 서명을 하지않았다고 서명거부혐의로 구속되는 일도 있읍니다.』
장씨는 18년간 미국법조계 생활중 가장 잊혀지지 않는 사건은 미국에서가 아니고 오히려 한국에서 있었다고 회상했다.
미국에서 검사생활을 하다 67년부터 71년까지 주한미8군 법률고문관으로 서울에 파견돼 있을 때였다.
한미항정협정 조인후인 69년 경북왜관에서 한국어린이를 엽총으로 쏜 미군병사의 변론을 맡았던 장변호사는 한국신문으로부터 『미국시민권자인 한인변호사가 법정에서 퇴장, 한국법정을 모독했다.』고 호된 공격을 받았다.
『내가 왜 한국법정을 모독하겠습니까. 당시 내가 미국시민권자이고 미군병사의 변호를 맡고있었기 때문에 순전히 한국신문이 오해한 것 뿐입니다.』 이제와서 새삼 사건전말을 얘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한국측 검사가 통역관을 젖혀두고 장씨에게 통역하라했고 또 피해자측 변호사없이 재판을 진행해 재판장에게 얘기하고 법정을 퇴장했을 뿐이라는 것.
『재판이 대구에서 있었기 때문에 그 지방의 한 일간신문이 보도하자 잇달아 서울의 각 신들이 대서특필했고 나중에는「워싱턴·포스트」지에 까지 났읍니다.』 장씨는 가장 어려웠을 때의 일을 씁쓸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변호사가 되기전 미국시민으로 귀화한 그는『당시 4·19, 5·16 등으로 국내정국이 급변하는데다 또 외국인은 변호사시험자격이 없어서 (현재는 외국인도 허용) 시민권을 얻고 미국에서 살게됐다』고 설명했다.
서울에서 경기중을 거쳐 48년 도미한 장변호사는 「인디애나」 주의 「얼햄」대와 「캘리포니아」의「샌타클라라」법대를 졸업하고 63년 미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판·검사를 먼저 지낸뒤 변호사개업을 하는 한국과는 달리 미국판사는 검사나 변호사를 거친 중진만이 될 수 있는, 미국법조인들이라면 모두 바라는 명예직이다. 검사나 변호사로서 10년이상 경력을 가져야하고 그 중에서도 인격을 닦아야만 임명될 수 있는 어려운 자리다. 보수면에서는 오히려 번호사보다 못해 연봉이 6만달러 정도로 알려진 이 자리를 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웃음으로만 대답할 뿐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경북 칠곡군이 고향인 그는 국무총리를 지낸 고장택상씨의 조카이기도 하다. 부인과 5남매의 자녀를 둔 다복한 가장. 오는 7월안에 판사선서를 마치고 8월31일부터 「캘리포니아」 지방법원판사 (근무지역은 미정)로 일하게 된다. 요즈음은 『작년 11월의 투병후로는 책읽는데 여가를 거의 보내고 있다』는게 그의 최근 생활이다.【로스앤젤레스지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