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생태·문예잡지 펴낸 소설가 박경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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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축축하게 봄비가 잘도 내린다. 부연 비안개 속에 진달래며 산벚꽃이 더 선명하고 예쁘다. 연한 봄 풀과 나무들은 이 비로 울울창창한 녹음, 짓푸른 생명으로 나아갈 것이다. 땅들도 훅, 후욱 심호흡 하듯 빗기운을 빨아들이고 있는 강원도 원주 오봉산 자락 토지문화관으로 소설가 박경리(朴景利.77)씨를 찾았다.

"뒷산에 꽃이 없어 지난해에 철쭉이며 진달래를 심었는데 다 실패했어요. 올해 다시 심은 그것들이 제발 이 비로 잘 살아나갔으면 해요. 두릅도 쑥쑥 올라와 이곳 창작실에서 전념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 입맛 돌게 해줬으면 좋겠고요."

날이 궂으면 나이가 나이인지라 온몸이 쑥쑥 쑤신다. 그런데도 朴씨는 이 봄비가 우주만물의 젖줄이라며 반긴다. 朴씨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건강한 삶을 위하여, 그리고 인간만의 질서가 아니라 우주적.총체적 질서를 깨치고 전하는 문학을 위하여 생태.문예 계간지 '숨소리'를 최근 창간했다.

또 장편 '나비야 청산(靑山) 가자'를 월간 '현대문학'4월호부터 연재하기 시작했다. 생태적 관점에서 해방 후 우리의 현대사, 특히 지식인들의 고뇌와 잘잘못을 짚어 나가겠다는 것이다.

"지금껏 우리는 '아는 것이 힘'인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나치즘.일본의 군국주의에 논리를 제공, 무수한 죽음을 부른 것도 우직한 백성이 아니라 선택 받은 '머리'들이었고 좌우익 동족상잔의 명분을 준 것도 이념, 곧 지식이었습니다. 정치.경제.사회 등 제반의 문제를 견제해야 하는 것이 지식인데 그 문제에 공조하고 심지어 모태가 되어 힘을 얻으려는 것이 문제예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지식인들의 부패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아는 것은 힘이 아니라 깨달음이 힘이 돼야만 합니다."

'명사가 되기 싫다''자연스레 살게 좀 놔둬라'며 朴씨는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지만 사진기자와 함께 넙죽 큰절부터 올렸더니 "갈등과 죽임의 시대를 바로잡아 생명의 흐름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서너 시간 거침없이 원로답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물질문명 때문에 지구가 깨지게 생겼어요.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경쟁만을 부추기는 자본주의가 막판에 와 있음을 직감합니다. 경쟁과 힘의 논리를 앞세워 아랍과 석유를 독차지하려는 미국의 저 이라크 공격을 보면서 이대로 가다간 모든 목숨들의 터전인 지구가 깨질 터,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생태적인 패러다임이 나와야 함을 절감해 잡지도 창간하고 새 연재소설에도 매달리고 있습니다."

합리주의.자본주의에 의해, 분업.전문화에 의해 삶의 총체성이 사라지고 부분부분 조각난 우리 삶의 숨통을 트며 터전을 넓히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피동적인 물질과 능동적인 생명의 차이를 잘 알아 생명의 질서인 생태계의 흐름을 배타적 흑백논리와 지식으로 막지 말고 터줘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은 자연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른 생명을 먹고 살아야 하는 먹이사슬의 이율배반이 생명의 본질이고 원죄입니다. 우주도 모순에 의해 생성됐고 생명의 본질도 이와 같이 이율배반적일진대 어찌 기존의 이분법적 지식으로 생명의 본질과 흐름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자연에서 배운 우주적 질서는 모순이다. 합리에 배척되는 이것저것 다 쳐내며 모순을 없애고 명쾌한 답변을 주는 게 지식이다. 모르는 것은 없는 것으로 해버리고 걸리적거리는 것은 치워버리는 것이 지식이기에 그 세계는 너무 작고 좁으니 모순을 껴안으면서 우주적 생태의 시각으로 우리 삶의 지평을 넓히자는 것이다.

"해방 이후 지도자 중 우주는커녕 우리 국토.민족을 한눈에 전망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반도 곳곳이 잘려먹히고 사회 각 부문에서 갈등이 폭발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그런 부문을 그 부문의 그 시각에서 다루려 하니 지도자도, 인간들도 자꾸 왜소화하고 있어요. 숨통을 트기 위해선 사회도 생명체로서 순환한다고 보고 흐름을 자연스레 터주는 총체적 시각이 지도자에게 필요한 시점입니다."

저녁을 내겠다며 창작실에 있는 젊은 작가들과 함께 '초대'한 朴씨는 동동주 앞에서도 계속 총체적.생태적 마음 씀씀이만이 모든 생명을 지킬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의 건강을 위하여 우리 모두 깨끗이 삽시다"라며 건배를 제의했다. 내내 깨끗이 건강하셔서 '나비야 청산 가자'가 대하(大河)로 흐르길 건배한다.

글=이경철 문화전문기자

사진=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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