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제주시 회천동 돼지 숲 마을|한라산록서 멧돼지 방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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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원시림의 탱크, 멧돼지들이 야산을 누빈다.
제주도 제주시 회천동 명도암 마을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멧돼지를 방목 사육하여 「돼지숲 마을」의 별명이 불어있다.
l년 전 만해도 60여 가구 2백인여명의 주민들이 홍당무 재배와 밭을 일구던 농촌마을.
이 마을의 주민 고봉만씨(51)가 지난해 5월 l백20마리의 야생 멧돼지가 마을뒤편 5만여평의 원시림에 풀어놓으면서부터였다.
『80여년 전만 해도 제주에는 순종 야생 멧돼지가 서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지금은 멸종상태입니다.』
고씨의 꿈은 야생 멧돼지를 l천여 마리를 번식시켜 한라산 원시림에 풀어놓아 이 일대를 국제적인 사냥터로 만드는 것.
키를 넘는 같대가 앞을 가리고 가시덤불과 용암석 바위가 뒤덮인 자연그대로가 멧돼지들의 목장이다.
유일한 인공시설이 관리인 숙사로 쓰는 폐차버스와 돌 벽 사이에 덮은 술레이트 지붕. 구태여 이름을 붙여 돼지우리라고 한다면 이 시설은 갓 낳은 새끼들이 큰놈에게 밟히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보기와는 달리 민첩>
야생상태에서 방목되는 멧돼지들은 생긴 것과 달리 민첩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들의 주식은 풀뿌리와 뱀·지렁이·굼벵이·꿩 등이며 흔히 4∼5m를 점프, 낮게 뜬 솔개를 낚아채 잡아먹기도 한다.
가축들의 공포대상인 전염병도 멧돼지들에겐 근접을 못한다. 작년 여름에는 인근 양돈장에서 돼지 콜레라에 걸려 죽은 돼지를 야산에 버렸는데 멧돼지들이 뜯어먹고도 끄떡없었다.
풀이란 풀은 가리지 않고 뿌리째 먹는 바람에 독초와 해독초가 섞여 체내에서 자연 중화가 된다는 것. 고씨의 부인 김순자씨(44)는 『저희들끼리 싸워 죽은 일은 있어도 병에 걸려 죽는 예는 한번도 없었다』고한다.
멧돼지 세계만큼 철저하게 약육강식법칙이 적용되는 곳도 없다. 일족의 추장 쟁탈전은 생사를 건 싸움. 주둥이 양옆으로 솟은 날카로운 어금니로 상대를 꼬눌땐 온몸의 혹 갈색 털이 곤두선다. 4백근 거구 멧돼지들의 전략은 상대의 공격을 유도해 역공을 가하는 허허실실 전법.
대회전은 단 일합(합)에 끝난다.
10여분을 노려보던 한 놈이 비수같이 몸을 날리자 납죽 엎드려 공격을 피한 놈은 상대가 미처 재공격의 자세를 취하기전에 번개처럼 옆구리를 치받아 치명타를 먹인다.

<가부장적 집단생활>
멧돼지들은 새로 된 추장을 따라 철저한 가부장적 집단생활을 유지한다.
멧돼지들을 사육하는 일은 하루에 두번씩 약간의 혼합사료를 주어 사람 말에 따르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전부.
벌써 2년째 멧돼지 집합훈련을 시키다보니 먹이를 주는 아침 7시와 오후 4시만 되면 낮잠을 자다가도 집합장소로 모여들 정도로 멧돼지도 시간관념은 정확해졌다.
『멧돼지처럼 사육하기 쉬운 동물도 없을겁니다. 사육에 드는 비용이라야 l년에 한번씩 내는 임대료와 2명의 관리인 봉급 20여만원, 훈련용 혼합사료가 하루에 한4되 정도지요.』 현재 고씨가 사육하는 멧돼지는 3백여마리. 원시림에서 분만하는 수가 80%룰 넘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풀숲에서 분만한 새끼를 발견하면 새끼를 상자에 넣어 우리까지 어미를 유인해온다.
멧돼지들은 분만직후에 신경이 가장 날카롭고 성질이 거칠기 때문에 유인과정에서 자칫 잘못하면 사람을 해치거나 새끼를 죽이기도 한다.
멧돼지의 임신기간은 보통 l백15일. 한살이 되면 암놈 임신을 할 수 있다.
보통 한 배에 6∼7마리를 분만하지만 다산일 경우에는 13마리까지 낳는다.
암놈은 분만이 가까워 오면 집단을 이탈하게되는데 이때 수놈도 행동을 같이 한다. 원시림에 장소를 정하면 가시덤불로 외성을 쌓고 갈대를 물어다 깐 후 용으로 비벼 부드럽게 만들고 분만을 시작한다.
암놈이 새끼를 낳는 동안 수놈은 식음을 끊고 분만장소에서 3m쯤 떨어져 몸을 숨기고 망을 본다.

<현재는 3백여 마리>
하루가 지나면 암놈은 먹이를 찾아 나서지만 수놈은 새끼가 혼자 걸을 수 있을 때까지 3∼4일간 같은 곳에서 꼼짝 않고 새끼를 지키는 부성애를 보인다,
갓 낳은 새끼멧돼지는 40∼50일이 지나면 혼자 먹이를 구하고 털 빛깔이 흑갈색으로 변하면서 수놈은 아래 어금니와 윗 어금니가 주둥이 밖으로 엇갈려 솟아 작두역할을 한다.
설씨가 멧돼지 사육을 시작한 것은 78년11월. 그해 9윌 경기도 ?주에 갔다가 농원에서 멧돼지 사육을 하는 것을 보고 방목사육을 착안했다.
3개월 가량 강원도 일대를 뒤진 고씨는 순종 멧돼지 7마리를 구해 아나동 l만2천 평 원시림에 풀어놓았다.
육지와 다른 기후에 견뎌낼 수 있을까 염려가 돼 1년여 동안 멧돼지들과 함께 원시림을 휘져으며 생태를 살피다보니 번식력과 생명력이 강해 그해 70마리로 늘어났다.
다시 6개월이 지나자 멧돼지는 l백마리를 넘어섰고 아나동 목장에서는 먹이를 구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가시덤불이 엉켜있던 목장은 멧돼지들이 뿌리를 파 먹어버려 불도저로 민 것처럼 허허벌판이 됐다.
고씨는 제주멧돼지 서식의 유래가 있는 돼지 숲 국유림 5만여 평을 평당 l2원에 임대했다.

<성돈은 20만원 육박>
멧돼지를 옮길 때 주변에서는 트럭을 이용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권했지만 설씨는 고집대로 왕초 멧돼지를 앞세워 6㎞거리를 떼 몰이로 이동했다.
1백20여마리를 옮기는데는 꼬박 12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이탈자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멧돼지들만큼 추장의 명령에 순종하는 동물도 없을 겁니다. 세 줄로 늘어서 이동하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지요.』
관리인 설달영씨(54)의 말이다. 현재 멧돼지는 성돈(85㎏ 기준)이 마리당 도매가격이 19만5천원. 새끼(15㎏짜리) 한 마리에 7만원으로 6개월이면 성돈이 되고 이기간에 한 마리에 드는 비용은 방목의 경우 2만원 정도로 수익성이 높다.
일본에서는 멧돼지 l근 값을 양돈 1근과 쇠고기 l근 값을 합친 정도로 유통되고있다.
『멧돼지고기는 양돈보다 고기가 연하고 기름기가 적어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는 게 스태미너 식이지요.』 멧돼지 불고기 집을 열겠으니 고기를 공급해 달라고도 하고 사육해보겠다고 문의해 오는 사람도 많지만 제주의 명물로 자랑할 수 있을때까지는 팔지 않을 작정이라고 설씨는 말한다.
내년이면 인근 주민들에게도 방목 사육을 권해 우선 멧돼지 사냥터로 만들어 외국관광객을 유치하고 다음엔 국내공급에 충당할 계획이다. <제주=엄주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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