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2)|제73화증권시장<제자=필자>(30)-「영화증권」 파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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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50년대 말과 60년대초에 걸쳐 우리나라 증권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윤응상씨. 당시 「증권계의 천황」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한 그가 명동에 모습을 나타내기만 하면 주가는 어김없이 출렁거렸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그의 「권위」도 사그라졌다.
무리한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들이 계속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는 없었다.
돈과 권력이란 두 날개를 꺾인 상태에서 그는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으려 명동증권가를 헤맸지만 그가 발붙일 곳은 없었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필자는 잠시 윤씨계의 영화증권 사장으로 있었다.
필자가 증권시장의 정상화를 위해 증권거래소와 증권금융의 자기 주를 매각하고 있는데 윤씨가 왜 자신의 다른 증권회사를 통해 매수작전으로 나섰었나하는 의문은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내가 영화를 그만두자 최모 부사장이 사장이 됐다.
이때 영화는 영업보다는 수도결제의 뒷수습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끝내 파산하고 말았다.
영화를 떠나기 직전에 많은 고객들은 대매수에 나선 영화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매수측은 필자를 천하의 공적인양 몰아붙였다. 「강성진이 때문에 우리는 모두 망하게 됐다」며 고객들을 선동했다.
하루는 집에서 전화가 왔다. 왠 남자가 5분마다 집에다 전화를 걸어 『내일 모레가 당신남편 장사 날이다. 나는 지금 장의사에 가는 길이다』라며 행패를 부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경찰이 잡고 보니 고객이며 「브르커」도 하던 김모였다.
매수측이 벌인 조잡한 연출극이었다.
당시 필자는 신변에 커다란 위험을 느껴 보호조치를 요청하여 한동안 경찰의 보호를 받은 일까지 있었다.
영화를 떠날 때에 인수인계가 정확하게 끝났는데도 당시 영화의 고객들은 나를 고발했다. 업무상 배임이나 횡령은커녕 협잡한 일도 없는 필자로서 두려울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검찰에 불려 다니면서 상사의 비밀까지 털어 놓아야하는 것은 곤욕스럽기 짝이 없었다.
일부 고객들은 필자의 가정집에까지 몰려들었다.
『여러 분들이 나를 고발했지만 나는 법적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장으로 있던 영화증권이 여러분의 거래를 시켰고 그로 인해 손해도 보았으니 도의적인 책임은 면할 수가 없겠지요.』
필자는 얼마 안 되는 사재였지만 이를 정리한 돈으로 피해의 일부분을 보상하고 고객들의 양해를 구했다.
법이나 외부의 어떤 압력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순전히 도의적인 책임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렇게되자 고객들은 하루아침에 나를 가리켜 「정말 고마운 사람」「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는 말로 나룰 추켜세워 쓴웃음을 짓게 하기도 했다.
이사건과 관련해서 지금도 필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있다.
나와 함께 일했던 임원 두 사람이 당시의 고발사건으로 재판에서 구형을 선고받았다. 그들은 민정수립에 즈음한 대사면령으로 풀려났으나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책임자로서 그들을 구하지 못 했던 자책감에 마음이 괴롭다.
증권시장의 개설이래 최대의 혼란을 일으켰던 62년이 저물고 63년이 됐다.
그러나 해가 바뀌었다해서 모든 일이 갑자기 좋아질 수는 없는 법. 한번 고장난 증권시장은 침체의 늪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주가는 연일 떨어지기만 했다.
이런 가운데 63년2월25일부터 73일간이란 장기 휴장에 들어갔던 증권시장은 5월9일에서야 다시 문울 열었다.
이 기간 중인 4월27일 증권거래법이 개정되고 주식회사체재의 대한 증권거래소는 5월3일 정부출자에 의한 특수법인인 한국증권거래소로 개편됐다.
62년4월l일 영단제에서 주식회사로 전환된 지 1년만에 공영제로 바뀐 것이다.
정부의 출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를 위해서는 관계법규정의 개정을 비롯 재정형편이 고려되어야하고 예산도 따야했다. 이러한 문제들이 쉽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거래소에 대한 정부출자의 앞길이 막막해지고 기대가 실망으로 변함에 따라 증시는 걷잡을 수 없는 침체의 국면으로 빠져 들어갔다. <속계>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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