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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자씨<114 전화 안내원>|피아노 마구 두드리면 후련…휴일엔 산을 찾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안내입니다』로 시작되어 『감사합니다』로 하루의 일과가 끝나는 114 전화번호 안내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피곤하고 짜증나는 반복작업이다.
하루종일 머리에 송수화기를 쓰고 안내대라는 기계 앞에서 TV화면과 같은 화면에 나타나는 숫자를 지켜보노라면 피로와 권태가 온몸에 쌓여 지쳐 쓰려질 것 같다.
그뿐이랴,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다, 서울운동장 가는 버스는 몇 번이냐는 등 별의별 안내까지 요구하는가 하면 그런 문의는 소관사항이 아니라고 대답하면 벼락같이 호통을 치기 일쑤다.
이럴 때면 숨이 막힐 것 같은 짜증이 나지만 친절하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직장 같으면 자리를 박차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 잠시 허리를 펴고 심호흡이라도 하며 짜증을 가라앉힐 수 있지만 계속되는 문의전화 때문에 일어실수도 없다 간혹 시골에서 서울에 온 순박한 촌노가 서울에 사는 아들집을 못 찾아 쩔쩔맬 때 이름만으로 전화번호를 알아내 집을 찾도록 해주고 그분이 고마워 할 때는 그 무거운 피로감도 금방 봄날 눈 녹듯 사라진다.
안내원들은 짜증이 났을 때 휴식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 휴게실에 준비된 피아노 앞에 앉아 아무 곡이나 마구 건반을 실컷 두드리며 음률에 도취하고 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안내원들은 여자이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남자들처럼 술을 마시거나 옥상에 올라가 발길질을 할 수도 없어 사무실(서울 을지로 6가)에서 보이는 남산을 바라보며 소극적으로 피로를 풀 수밖에 없다. 처음 교환원 생활을 시작한 후배 중에는 자다가도 『안내입니다』하고 잠꼬대를 한 일도 있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어 대부분 10여분간인 휴식시간에 음악을 듣거나 뜨개질을 하고 다리를 올려놓고 피로를 풀거나 간혹 간식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휴일에 배낭을 매고 산에 올라 봄의 상쾌한 하늘을 향해 『전화번호부 좀 찾아주세요』하고 소리치고 나면(사실은 마음속으로 소리칠 때가 대부분이지만) 가슴이 가장 후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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