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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사랑」의 복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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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미 20세기 70년대의 마지막 해에 들어섰건만 천전인민공사의 청년들 마음속에는 아직도 「사랑」은 낯설고 신비스럽고 입에 올릴 수 없는 낱말이 되고 있었다. 때문에 이 공사의 공화당에서 열린 「매매혼인의 반대」대회에서 새로 선출된 당서기가 이 낱말을 큰 소리로 외쳤을 때 청중들은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청년작가 장현은 사랑을 부도덕한 것으로 강요한 중공사회의 규율로 파생된 사랑하는 젊은 연인들의 비극적 종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의 사랑에의 의지는 그칠 줄 모르게 움트는 현실을 그린 「사랑의 잊혀진 구석」(「상해문학」80년 제1기)을 발표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방년의 주인공 심황매는 사랑이라는 말만 들어도 치욕스럽고 몸이 오싹해진다. 새로 선출된 젊은 당서기 허영수가 사랑을 고백했을 때 황매는 『수치다-.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수치다!』라고 절규하며 구애를 뿌리친다. 언니 존니가 한 청년과 밀애를 나누다가 들켜 결국 못에 투신자살해야 했고 그로 인해 가족들에게는 반 혁명분자의 낙인이 씌워졌던 일을 황매는 잊을 수 없었다.
허는 그러나 황매의 마음속에 넓게 자리잡기 시작하고 그녀의 얼어붙은 사랑의 감정을 녹인다. 부모가 그녀를 이웃 청년에게 팔아 넘기려 했을 때 그녀는 그 동안 저주스럽기만 하던 언니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고 참사랑에 눈을 뜬다. 그녀는 인습을 박차고 사랑의 자유를 찾아 나선다는 것이 이 소설의 줄거리다.
이 소설은 사랑(애정)이란 낱말 자체가 금기 시 되어온 사회풍토가 오히려 이성간의 은밀한 성적결합을 쉽게 조장하는 경향을 낳고, 이와 더불어 무도덕한 매매혼인의 폐습이 사회에 뿌리깊이 박혀있다는 현실을 신랄하게 파헤쳤다는 중공내외의 평을 받았다.
억압받던 성문재가 중공에서 개방체재의 수립과 동시에 「복권」된 것은 조금도 이상스러울 것이 없다.
방중술의 극치를 이룬 고대의 「소여경」은 물론이고 성문학으로 유명한 「금병매」 등에 나타난 성과 사랑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과 관심은 어떤 민족에게도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80년 초 요령성의 인민출판사는 생리와 성에 대한 지식을 간략하게 기술한 「부녀위생문제」란 소책자를 출판하여 삽시간에 매진되는 「이변」을 낳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랑이란 말 자체를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더러운 것」으로 여겼던 사회풍토에서 여자의 자위행위까지 설명한 책자의 발간은 하나의 「혁명」이었다.
이 소책자는 여자들이 가슴의 발육을 수치스럽게 느끼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풍만하고 균형 잡힌 가슴의 발육을 돕기 위한 방법을 삽화로 그려가면서 해설했다. 「명보」(「홍콩」의 중립지)는 그와 같은 가슴의 삽화는 30년만에 처음으로 금구를 허문 사건이라면서 이 소책자는 암시장에서 정가의 수배로 암매되고 있다고 했다.
이 소책자가 공전의 성공을 거두자 광주에서는 청소년들에게 연애의 기법을 자세하게 설명한 지하출판물이 나와 청소년들의 필독서가 되고있으며 상해출판사는 「사람의 갈등과 그 해소방법」이란 애정지침서를 81년 초에 내놓아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고 「북경일보」는 전했다.
상해의 홍구공원(이봉창 의사가 일제의 백천대장을 폭살시킨 곳)에는 밤만 되면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는 남녀들로 만원사례(「쟁명」지)다. 경찰은 이들을 폭력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순찰을 하며 이 같은 사람의 열병은 전국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상해의 한 고교생은 연초에 교육부에 보낸 합의서한에서 「사람의 공해현상」을 개탄했다.
이 학생은 영화나 텔리비전극, 또는 소설들이 사람이 주체가 아닌 것들조차 사랑하는 장면을 담고있어 『도대체 사랑으로부터 도피가 불가능한 사회환경이 됐다』면서 『10대 소년·소녀의 정서순화를 위해 그 같은 작태는 제동이 걸려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대중들은 사랑을 주제로 내세운 소설들이나 영화·연극이 더 많이 나오길 바라고 있다. 무명의 청년작가 장양(37·호남성장사)은 이런 분위기를 타고 전국에 문명을 날리게된 행운아다.
그는 60년대 초부터 두 남녀과학자의 애절한 사랑의 역정을 소설로 썼다. 그의 원고는 필사본으로 전국의 광범한 지역에 나돌았다. 이 필사본은 마침내 요문원(전당정치국원·문화혁명 4인방의 일원)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수정주의를 고취하는 위험천만한 독초』라는 낙인을 찍히고 작가도 반혁명분자로 투옥되었다.
그러나 4인방의 몰락이후 이 소설은 다시 햇빛을 보게되어 79년에 초판 30만 부를 찍어내 1주일도 안되어 매진됐고 탤리비전극과 연극무대에 다투어 올려졌다.
최근에 쏟아져 나오는 소설들 가운데 혁명정신을 내세워 사람을 무조건 희생시킨 중공의 정책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비극을 맛본 과거를 통렬하게 고발한 작품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수많은 청년들이 공산당에 대해 회의와 불신을 보내는 오늘의 현실도 근원적으로는 이같이 인생을 무시한 중공의 정책에서 비롯되고있다고 좌파지식인들은 지적한다. <이수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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