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2)제73화 증권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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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증권거래법 제정>
1·16국상파동과 대 증권파동-. 어찌 보면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했던 당시의 증시가 그것도 두 번씩이나 거푸 치려야 했던 홍역과 같은 것이었지만 어쨌든 개장초기의 증시에서 알던 투기성 「증권바람」의 풍향과 풍속을 조절하는 일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한때 말죽거리에 불어 닥쳤던 복부인네들의 치마바람과 견준다면 숫제 태풍이었던 듯싶다.
증시에서만큼은 「보이지 않는 손」이 곧잘 사태를 파국으로 몰고 가 자칫 증시의 문을 닫을 위기를 불러 일으켰고 이 고비를 넘기려는 재무부나 거래소 측의 조치는 하루아침에 증권회사들을 파산시키는 등 그대로 「사자」와 「팔자」의 흥망성쇠에 직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만해도 너나할 것 없이 「굵직한 배경」을 업고 있었던 증권회사들은 거래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일이 빈번했다.
초기의 시장관리를 이토록 어렵게 만들었던 주범은 역시 청산거래제도였다.
청산거래제도를 시행하게 된 이유와 배경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거니와, 이제와 돌이켜 보면 역시 장기청산거래의 공보다는 과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즉 양적 공급의 확대라는 본래의 효과도 보았으나 「돈 없이 사고 물건 없이 파는」 거래상의 허점이 투기꾼들에게는 좋은 유혹이었던 것이다.
당시 여론은 청산거래제도하에서 이 같은 증권업자들의 대결은 극히 정상적인 것이며 더구나 호재과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과열현상은 거래소나 재무부가 사전에 증?금률의 인상 등으로 충분히 규제할 수 있다는 쪽이었다.
심지어 1·16국채파동당시 재무부에 의한 1·17무효조치에 대해서 모일간지는 연2회에 걸친 사설을 통해 자유거래제도의 증시를 파괴시키려는 엄청나게 무식한 소이라고 공격하면서 무효선언의 취소를 주장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증권거래라는 것은 원래가 일정한 양이 일정한 가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나 지금이나 급변하는 국내의 정세와 그때 그때의 수급, 게다가 꾼 들에 의한 시세조작까지 합세해 수시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투기와 투자의 한계성을 구분하기 힘든 당시의 상황에서 주가의 등락이 어느 선까지 이룰 것인가를 예측하고 사건조치를 취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따라서 당시 대개의 시장관리는 사후조치일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면 비상수단으로 1·17무효선언 같은 「폭탄」도 터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시장관리를 둘러싼 업자 측과 거래소와의 가부논쟁은 곧잘 법정으로까지 번지곤 했는데 그때의 기억을 되살릴 때마다 필자는 지금도 섭섭하다 못해 불쾌하기까지 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당시 거래소가 취했던 조치 등은 모두가 증시의 안정을 위한 합법적인 것이었음에도 법정에서는 어이없게도 거래소 측의 패소로 끝나는 일이 종종 있어 결국 더욱 심각한 증시의 혼란을 가져오곤 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은 그 상관행이 묵이하여 특수성을 띨 수밖에 없는 증권관계법규에 대한 이해부족의 소치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SEC(증권 및 증권거래위원회)라 하여 증권관계 분규를 직접 다루는 준 사법적인 기구가 있고. 또 법원에도 전문 부서가 설치돼 있다. 우리도 하루 빨리 법원 등에 증권 전문 부서를 설치해야 한다는 필자의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
아뭏든 1·16국채파동에서 뼈아픈 교훈을 얻은 거래소와 업계는 다같이 증권모법의 제정을 갈망하게되었고 이에 따라 증권거래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으나 대 증권파동으로 통과되지 못하고 결국 5·16혁명 후 62년1월15일에야 증권거래법이 공포되었다.
이때 증권계에서는 건국이래 처음 가져보는 자본시장의 모법이라는 점에서, 더 나아가 이제 증권업도 정부의 규제와 육성의 대상이 되었다는 만족감 때문에 뜨거운 환영을 표시했다.
따지고 보면 일제가 사용했던 조선취인소령이라는 남의 옷을 빌어 출범된 증권거래소설립이래 6년, 해방 후 17년만에 처음으로 우리 손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게된 셈이었다.
증권거래법 제정에 대한 노력은 제국국회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직후 증시재건을 서두르는 인사들이 가장 먼저 착안했던 것도 증권거래법이었고 이후 증권업계에서는 증권연구소라는 자발적인 단체를 만들어 후일 5·16 혁명정부에 의해 통파된 증권거래법의 법안도 사실은 이곳에서 이미 기초작성 되었었다.
제정된 법안의 초점은 이제까지의 영단제거래소를 주식회사 제도로 바꾼 것과 결제제도의 변경 등이었는데 이는 국채파동 이후 거래침체로 고전을 면치 못하던 당시 거래소를 주식회사로 바꾸게되면 10여종의 주식가운데 주력주로서 전체 장세를 이끌 수 있어 활기를 찾게되리라는 증권업계의 주장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법이 최선의 제도를 보장하지 만은 않았다.
그토록 갈망하고 오랜 진통 끝에 생겨난 증권거래법 하에서 증시사상 전무후무의 62년5월 파동이 움텄으리라고는 아무도 몰랐었으니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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