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성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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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살아있는 3·1 만세」의 마지막 한 분인 연당 이갑성옹이 타계했다. 향년 95세, 천수를 누린 셈이다.
62년 전 그분의 나이 33세 시절, 3월 초하루 오후2시 서울 인사동 태화관엔 민족 대표 29명이 모였다. 지방에 있던 길선주 등 4명은 참석 못한 것이다.
한용운의 개회선언으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는 동안 이갑성은 총독부와 종로경찰서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일을 말았었다. 10분도 못돼 밀어닥친 일경이 이들을 연행했다.
이갑성의 감옥살이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징역 2년6개월 선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이갑성은 거기서도 1천여명을 규합, 만세를 불러서 형기가 3년으로 늘어났다. 부인 차씨는 네 살이 갓 넘은 차남을 업고 금화산 중턱에서 감옥올 내려다보곤 했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3·1운동에서 이갑성의 역할은 거사전에도 있었다. 당시 대선배이던 천도교의 손병희, 기독교의 이승훈 등과 함께 거사의 일원화를 협의했다. 당시 「세브란스」병원 약제사로 근무하던 이갑성의 방은 거사의 비밀연락장소였다. 거사전야엔 6백장의 선언서를 이용설 등 학생대표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생애 통산 9번의 옥고를 치르는 동안 그의 가정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상해망명동안엔 부인이 바가지를 들고 지사들의 집을 전전하며 쌀을 거두었다고도 한다.
그가 전국을 돌며 애쓴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끝내 좌절됐고 신간회도 자체분열과 일경의 탄압으로 해체됐다.
당시는 일본 무단정치의 극성기였다.
3·1운동 전해인 1918년에만도 각종 형사·의옥사건이 14만2천건에 이르렀다.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이었다.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하고 도의의 시대가 내하도다』하는 귀절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얼마나 절절했을지 짐작이 된다.
물론 3월1일 이후에도 두 달 동안 일경에 학살된 동포가 7천명이 넘는다.
이갑성도 생전에 머리에 고문자국이 남아있어 때때로 통증이 온다고 호소했다.
3년 전까지는 실어증에 걸렸으면서도 기념식장에서의 선언문 낭독은 자신이 해야한다고 고집했다.
와병 중 『조국통일을 보지 못한 채 무슨 면목으로 선열들을 대하겠느냐』고 한 말은 오늘의 현실을 꾸짖는 것 같아 송연한 느낌이 든다. 광복 후 그의 정치활동은 별로 세인의 기억에 없다. 역시 그는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기억된다. 이제 그의 목소리, 그의 모습은 갔어도 그가 뿌린 씨앗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3·1운동은 우리의 생명이요, 교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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