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서독의 한국인 간호원|성실과 친절이 밑천…4천6백 명 정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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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서독에 교포사회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지난 65년, 간호원들이 무리 지어 오면서부터다. 약 l만여 명이 건너왔지만 절반이상은 귀국했거나 미국·「캐나다」등 제3국으로 터전을 옮겨갔고 지금은 4천6백 명만이 남아「베를린」·「헤세」·「바덴뷔르템베르크」·「함부르크」등지의 9백여 개 병원에 흩어져 일하고 있다. 재독 교포는 광부 등을 포함 총 l만5천여 명. 따라서 서독 교포사회는 간호원이 중심이 되어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독정부는 지난 76년부터 간호원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현재 독일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간호원은 30대 중반에서 40대 초엽이 주축을 이루고 있고 대부분이 결혼도 했다. 말하자면 20세 전후의 꽃다운 나이에 건너와 중년부인이 되기까지 이들이 겪은 희노애락은 바로 초창기 서독교민 사다. 한국간호원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은「베를린」(약l천명). 한인간호협회장 김남태 여사(51)는『재일 교포가 징용에서 비롯됐고 재미교포에는 도피성분자도 일부 끼어 있지만 재독 교포, 그 중에도 간호원과 망부들은 당당히 취업이민을 했다는 점에서 긍지를 느낀다』고 재독 교포들의 정신적 바탕을 실명했다.

<광부 포함 교민 만5천여 명>
지금은 월 수 2전∼2천3백「마르크」대(한화 64만∼73만6천 원)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초기 10년간 한국간호원들이 밟아 온 역점은 인고의 연속이었다.
안화영씨(간호협회부회장)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한국에서는 간호원이란 주사나 놓고 시간 맞춰 투약을 하는 등 의사의 보조기능만 충실히 하면 되었지요. 왜냐하면 환자 옆에는 항상 보호자가 따라붙어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독일의 간호원 역할은 판이했어요.
의사와 간호원을 제외하고는 일체 병실출입이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환자의 배설물까지 받아 내야 하는 등 일거수 일투족을 간호원이 보살펴 추어야 합니다. 집에서 귀여움만 받다가 여기 와서 비대한 서양환자들을 들었다 놓았다 하자니 눈물이 걸로 났습니다. 말이 제대로 통하기를 하나, 음식이 맞나….』
어쨌든 한국간호원들은 일에는 차갑고 매섭기로 소문난 독일인 틈에서 인고로 이 과장을 극복해 냈다.『독일인보다 못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여기에서 욕을 먹으면 조국이 빈축을 받는다. 속은 쓰리고 아프더라도 미소는 잃지 말자』는 것이 이심전심의 다짐이었다.

<추방 면하려 국제결혼, 후유증>
심신이 약해진 환자에게 보인 한국간호원들의 친절은 서서히 독일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고「소문」은 이곳「매스컴」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병원과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할 무렵 이들에겐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결혼과 체류연장문제-. 비슷한 시기에 독일에 온 광부나 한국유학생을 만나 짝을 짓는 사람은 다행인 편에 속했다. 수적으로 2대l로 여자가 많았으니까.
약4분의1은 외국신랑을 골랐다. 국제결혼을 한 사람 중에 정부관리·사업가·학자 등의 남편을 맞아 중·상류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으나 문화적 갈등 등으로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한 사람도 허다하다.
국제결혼「커플」의 모임인 한-독 우석회는 상호정보교환·「카운슬링」으로 문제를 지혜롭게 대처하자는 뜻에서 매달 한번씩 모인다.
대사관의 김희영 노무 관(여)은『독일에서 한국간호원들이 성공적으로 정착한 데는 그들의 성실·근면·친절이 가장 큰 요인이겠으나 간호원이 독일여성에게는 기피직종이란 점도 간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임금에 비해 노동량이 과다하고 주말·야간용 즐길 수 없어 독일여성들은 간호원이 되길 싫어한다.
지금은 제도적으로 개선이 되었지만 3년 계약으로 온 간호원이 체류연장 허가를 받는 일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실제「추방」을 면하기 위해 급히 독일남자와 결혼한 예도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중혼·사기 등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다.
서독정부는 지난 79년 외국인 입국규제법을 개 정, 외국인이 범죄·세금미납 등 국내법을 위반하지 않고▲5년 이상 체재하면 장기체류 허가를▲8년 이상은 영주권을▲10년 이상은 원하면 시민권도 부여하고 있다.
외국인 근로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유고」「터키」「이탈리아」사람들에 비해 교육수준이 높은 한국간호원들은 이젠 거의 이 법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사회보장 혜택도 받고 구멍가게를 내더라도 독일인 명의를 빌어야 했던 제약이 없어졌다. 간호원의 한국인 남편들은 앞다투어 음식점·식료품 점을 냈고 취직도 쉬워졌다.
드디어 저축의 여유가 있는 맞벌이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교포모임이 있을 때 집결되는 차종도「벤츠」「볼보」등 고급으로 바뀌었고 고국의 부모들에 대한 송금액수도 늘어났다.

<학업 계속해 석·박사 따기도>
윤처원「베를린」총영사는『독일 교포들의 생활수준이 지금은 60년대 재미교포 수준이지만 따라잡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했다. 얼마나 더 잘사느냐가 문제라는 뜻이다.
본국송금은 확인만 되면 독일정부로부터 면세혜택을 받기 때문에 이를 위한「또순이」들의 대사관출입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
간호원 중에는 독일에서 학업을 계속해 석사·박사「코스」를 밟은 사람도 있다.
한국에서 간호대학을 졸업한 사람에게는 의과대학·치과대학 입학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에 간호원으로 와서 의사가 된 사람도 있다.
이제 이들에게 남은 근심은 6, 7세 짜리 2세들의 교육문제.
그리고 대부분의 교민들은 노후를 고국에서 보내야겠다는 일념에서 더욱더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글=전 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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