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위해 평생 일만 했지 남의 가슴에 못박은 일없다"|"지칠 대로 지친 윤상군 아버지 이정식씨 본사 기자와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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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충혈된 눈, 새까맣게 탄 입술, 까슬까슬한 턱수염에 초췌해진 얼굴-. 온 세상이 찾고 있는 윤상군 (14)의 아버지 이정식씨 (44)는 바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사건 공개 후 부쩍 담배가 늘었다는 이씨는 연신 줄담배다.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살아 이 고통을 받아야하는지….』 6일 밤 본사 기자와 단둘이 만난 그는 탈진한 모습으로 「인생의 업보」를 되뇌는 듯 애타는 심정을 털어놓았다.
-요즘 생활은.
▲말이 아닙니다. 애 엄마는 음식도 안 먹고 나도 긴장만 풀리면 곧 쓰러져 병원에 가야할 것 같습니다. 연수 (15)도 5일 입학식을 했지만 학교에 가기가 싫은 모양입니다. 온 가족이 허탈 상태에 빠져 친척과 동네 사람들의 위로에 힘입어 버티고 있지요.
윤상이가 집을 나간 다음부터 사업에는 손을 떼다시피 했어요. 지난해 11월 대목도 죽을 쒔어요.
-수사 공개 후 달라진 것은.
▲우선 신문·방송들이 그처럼 열성적으로 도와주는데 정말 놀랐습니다. 윤상이를 못 찾아도 그 은혜는 잊지 못하지요.
아무 것도 아닌 서민의 자식이 없어졌는데 경찰에서도 큰돈 들여 일해주는 것을 보면 돈버는 강사 밖에 모르는 놈도 국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경찰 수사 협조하랴, 기자들 상대하랴 귀찮은 일도 많지요.
▲그거야 부모가 당해도 싼 일이지요. 경찰이나 보도 기관 양반들이 수고하시는데 비하면 우리 고생은 아무 것도 아니지요.
다만 장난질 전화나 편지는 그만둬줬으면 좋겠어요. 5일에도 범인이라는 사람이 나오라고 해서 인천에 3군데씩이나 경찰을 따라나가 봤지만 허탕만 쳤어요.
부모 심정도 좀 생각해줘야 할텐데 너무들 하더군요. 아무리 시달린다고 한들 내 고생이 윤상이 고통만큼 하겠습니까. 범인들이 부모 심정만큼 초조하겠읍니까.
-용의자나 단서가 없다보니까 부모 주변에 뭘 숨기는게 있지 않나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세상 사람들이 우리 부부가 배운게 어떻고, 재산은 어떻고 하면서 뭔가를 틀어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우리 집안을 아는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우리는 일과 아이들 밖에 모릅니다. 장사꾼이지만 남의 가슴에 못 박힐 짓을 한 적은 정말 없읍니다.
우리 집사람은 전수 학교인가를 나왔고 나는 학교 문턱에도 못 가 봤지만 그게 뭐 대숩니까. 어릴 때 한 고향 (평택)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맺어졌지요. 애 엄마는 그때나 지금이나 알뜰한 여자입니다. 가정부도 안 두고 손에 군살이 박히도록 일만해 온 사람이 형편 좀 나아진 뒤 곗 놀이 좀 했다고 해서 흠이 됩니까. 그런걸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들 너무 심한 것 같아요.
-윤상이 아버님 고향에 가 보니까 노름하다 쫓겨날 만큼 도박을 좋아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어릴 적 일이지요. 4살 때와 11살 때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 머슴으로 들어가 군대 가기 전에 쌀 60가마쯤 모은 것 날렸지요. 그때는 겨울만 되면 너나할 것없이 온 동네에서 노름들을 했어요. 유독 나만 노름꾼으로 모는 것은 억울합니다.
-윤상이는 지금 어떤 상태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요.
▲글쎄요. 애 데려간 사람들이 돈이 많아 제대로 먹이기나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죽였다면 파묻은 곳만이라도 알려주었으면 오죽 좋겠읍니까.
-경찰 수사가 오리무중을 계속 헤매고 있어 사건이 미궁에 빠져드는 느낌인데 아버지로서 마음속에 집히는 사람은 없읍니까.
▲난들 알 수 있습니까. 윤상이가 11월에 유괴된 것으로 봐서는 우리 가게가 그때쯤 대목인 것을 알고 발목을 묶어 사업을 망치려고 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럴만한 사람도 별로 없고 의심 가는 사람도 만나봤지만 혐의가 없다지 않습니까.
-범인들로부터 전화가 온 첫날 금액 흥정을 벌이면서 「한탕」 소리를 했다는데.
▲처음에는 그쪽에서 4천만원을 내라고 해서 요즘 같은 불경기에 무슨 소리냐, 그만한 돈은 없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3천만원은 어떠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2천만원도 힘들다, 더 이상 필요하면 다른데서 한탕 더 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지요. 「한탕」은 우리 장사꾼들 용어예요. 큰손님을 받는다든가…. 돈을 깎은 것은 돈이 아까 와서가 아니라 범인들에게 진지한 거래를 하고 싶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겁니다.
-점을 많이 보았다던데.
▲오죽 답답하면 그랬겠읍니까. 귀신 장난도 아니고 정말 환장할 노릇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만큼 복채도 썼으면 귀신도 시원한 대답을 해줄텐데…. 맞는 것은 하나도 없이 돈만 돈 백 날렸어요. 그러나 아깝진 않아요.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실 작정인지.
▲애 엄마가 저렇게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큰일입니다. 아내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게 될 것이고…. 연수가 불쌍합니다. 웬만큼 사건이 잊혀지면 집을 팔고 연수 학교 근처로 이사 가야지요. 요즘엔 노이로제에 걸려서인지 연수가 혼자 학교에 다니는 것이 몹시 불안합니다.
이런 변을 당하고 나니 가족은 물론, 주변의 안다는 사람들까지 큰 고생을 하더군요. 정말 자식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한 아비로서 면목이 없읍니다.
-범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차라리 칼을 들고 내 집에 들어와 돈을 달라고 하는 것이 신사적이 아닙니까. 지금이라도 돈과 맞바꾸자면 나 혼자 돈을 들고 나가겠습니다. 내 자식을 죽이고도 멀쩡히 살아갈 수는 없을 겁니다. 내 전 재산을 바쳐서라도 붙잡아 국민 앞에 단죄를 받도록 할 것입니다.

<홍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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