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녀였기에…비운의「80평생」|고종의 서녀 이문용 여사의 사록을 들어보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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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전주=김수길·장남원 기자】삼단 섬들에 쑥색 고무신 한 켤레가 단정히 놓여있다. 이태조의 어진(어진=임금의 초상화)을 모신 경기전(전북 전주시 풍남동 3가102) 안뜨락 양지바른 재실-. 역사의 아픔과 여인의 한으로 80평생을 눈물 속에 살아온 비운의 주인공이 말년을 보내고 있는 곳이다. 이씨조선의 마지막 황녀 이문용 여사(81) .「백인」이란 어릴 적부터의 아호가 이미 그의 가시밭 인생을 예견이나 했던 듯 운명과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여인의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겼던 왕족의 후예다.
『양삿골 이 대감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도 내 신분을 모른 채 시골 촌부로 늙었을 거예요. 차라리 그편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지….』
이 여사가 옹주로 세상에 태어난 것은 이 나라의 국운이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가던 1900년 음력10월8일. 당시 민비의 뒤를 이어 고종의 순빈으로 책봉되었던 귀인 엄씨(이 여사의 이복 오라버니인 영친왕의 생모)의 핍박을 받아 궁 밖으로 쫓겨난 이 여사의 생모 염 상궁은 계동 어느 민가에서 산고의 아픔조차 소리 죽여가며 이 여사를 낳았다.
이렇듯「왕실의 개구멍받이」로 출생부터가 기구했던 핏덩이는 아기의 목숨을 노리는 엄비의 손길을 피해 어느 촌부에게 맡겨졌다. 9살이 될 때까지 김천의 물방앗간에서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간난이」로 가난에 절어 살았다.
『7살 나던 해 친부모로만 알았던 양부가 돌아가시고 양모마저 도망가 버려 졸지에 고아가됐지요.』
이때부터 어린 옹주는 동네 연자 방앗간에서 새우잠을 자고 주먹밥을 얻어먹는「동네 거지』로 2년여를 지냈다.
옹주가 9살 되던 해 그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이재곤 학부대신은 끝내 김천에서 옹주를 찾아냈다. 『거지옹주』는 상궁나인들의 손에 이끌려 염문도 모른 채 상경, 일경과 엄비의 눈을 피해 창경원 옆 원남동 비밀 집에서 황녀로서의 예절과 법도를 배우며 비로소 자신의 출생과 신분에 눈을 뜨게된다.
『그때까지도 내 어머니가 누구인지 몰랐고 한참 후에 염 상궁이란 사실을 알았지만 이미 엄비가 내린 사약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신 후였습니다.』
17살 되던 해 당대의 우국지사 김한규의 며느리가 되고 진명여학교에 진학, 신식 공부를 익힌다. 그러나 결혼하자마자 일본유학을 떠났던 남편 회진은 3년만에 돌아와 한강에 물놀이를 나갔다 익사하고 이 여사는 열 아홉 청상이 되었다.『남편과 사별한 다음해 한 살 난 아들 필한이 마저 병사하고 나서 젊은 나이에 벌써 팔자를 한탄하게 됐지요.』
겹치는 불행에 눈물 흘릴 틈도 없었다. 왕족 후손들에게 점점 죄어드는 일경의 손을 피해 이 여사는 1921년 어느 겨울 밤 혈혈단신 상해로 피신, 후년 해방 때까지 이역만리에서 객지생활을 했다.
해방이 되던 해 시댁이 있던 원산에서 두 시동생을 데리고 서울에 올라와 명륜동에 살림의 터전을 잡으려할 즈음 이 여사에게는 난데없는「빨갱이」의 누명이 씌워졌다. 이북에 남아 좌익운동을 하던 시동생 철진이 생활비에 쓰라고 갖다준 금덩이 때문이었다.
서대문 구치소 미결수 생활이 2년.
『출감 후 닷새만에 6·25가 터졌어요. 홀몸으로 부산으로 피난, 삯바느질로 연명하다 보니 휴전이 되더군요.』서울 집은 낮선 사람들이 차지해버렸고 이 여사는 서울이 싫어 멀리 강릉으로 떠났다.
어느 날 강릉 경찰서 사복형사 2명이 이 여사를 찾았다. 셋방서 주인이 이 여사의 신세한탄만을 듣고 간첩으로 밀고한 것이다. 이미 환갑 나이에 들어선 그녀에게 다시 반공법 위반죄로 10년형의 선고가 떨어졌다.
이로부터 10년간 서대문 형무소와 전주 형무소를 오가며「기품 있는 할머니 모범수」는 자신의 모진 운명을 감수하는 법을 배웠고 점차 기독교 세계로 깊이 들어가게 됐다.
10년의 형기를 모두 마치고 출감한 70년10월16일은 유난히도 쓸쓸한 이 여사의「부활절」이었다. 형기를 마친 여죄수가 갈곳은 형무 소장이 주선해준 갱생원 뿐.
그러나 출감당일 비로소 자신의 신분을 밝힌 이 여사의 소식을 들은 전주 형무 소장은 이를 서울의 모 신문사에 연락,「매스컴」마다 대대적으로 이 여사를 소개했다.
신문을 보고 달려온 이재곤 대감의 둘째 아들이며 동생뻘이 되는 이섭용씨를 만나게 되었고 당시 전북 도지사의 주선으로 전주이씨 위패가 있는 경기전에 여생을 보낼 거처가 비로소 마련되었다.
2평 남짓한 방 셋에 재래식 부엌이 딸린 자그마한 고옥이지만 근 10년간 이 여사의 살뜰한 손길이 닿은 경기전안 재실은 온돌에 따스한 온기가 감돈다. 자신의 호를 따 백인당 이란 이름도 지었다.
한국 근세사의 격동을 운명처럼 겪어온 황녀 이 여사의 건강은 요즘 말이 아니다.
고혈압에 당뇨가 겹쳐 인근 송한의원에서 한약을 줄곧 달여다 먹고있으나 별차도가 없어 새벽 청소 말고는 일체 기동을 삼가고 있다.
『늘그막에 비록 나다니지는 못하지만 내 처지를 듣고 찾아와 이제는 친자식처럼 된 몇몇 수양딸들과 서울에 있는 7촌 조카 등이 가끔 들러 말벗이 되어주지요.』
요즈음엔 비슷한 연배의 동네 할머니들과도 친해져 이 여사의 방엔「정담」을 찾는 할머니 친구들의 발길도 가끔 있어 그나마「소외」의 허전한 공간을 메워준다.
『구호양곡이 조금 나오고 도지사나 서울의 몇몇 분들이 가끔 생활비를 보태주셔서 모진목숨이나마 그럭저럭 이어나가지요.』평생을「빼앗기며」살아온 이 여사에겐 지금의 거처나 생활 모두가 고마운 은혜다.
이 여사의 숨은「후원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보태주는 돈으로 월13만여원의 생활비를 충당하고 우연히 알게된 비슷한 처지의 여인 안악댁(32) 이 함께 살며 빨래나 밥 시중 등을 해주지만 주위 청소나 거처하는 방의 정돈은 남의 손을 빌지 않는다.
『음력 정월 스무날이면 홍릉에서 올리는 고종황제의 제사에도 재작년부터는 몸이 불편해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날이 풀리면 건강이 더 악화되기 전에 홍릉에를 다녀와야 되겠어요.』 멀리 북쪽하늘을 바라보는 이 여사는 왕족의 명예보다 필부필부가 진정한 인생의 행복이라며 말끝을 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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