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7)「마산관」·「판문점」등 낯익은 간판 즐비|일본 동경 대만의 한국 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동경의 부도심「우에노」역 앞「오까찌마찌」의 아침은 먼동이 트는 새벽6시부터 시작된다.
주변의 일본인 상점들이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오까찌마찌」의「코리언·마켓」은 문을 열고 장사를 시작한다.
동경에서「오까찌마찌」는 이를테면 한국인상가의 대명사다.
「택시」를 타고『「오까찌마찌」까지』하면 운전사가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본다. 한국인이냐는 뜻이다.

<생활수준도 상위권>
「마산관」「판문점」「군산상점」등 낯익은 이름의 간판들이 즐비한 거리에 들어서면 여기가 일본 땅이라는 생각을 잠시 잊는다.
진열된 상품도·깍두기·고춧가루·송편·시루떡 등 한국의 냄새가 물씬 나는 것들이지만 주고받는 말도 한국말이 자연스럽다. 동경에서 일본말을 몰라도 아무 불편을 느끼지 않는 곳이 이곳이다.
30여개 한국인 점포가 몰려 있는 이 시장을 드나드는 고객은 줄잡아 하루 1천 여명.
그중 70%가 한국인이라는 제일물산 주인 강은순씨(29·대동구 동상야 2정목15의5)의 말이다.
「우에노」역 부근에 사는 6백여 가구 3천명 가까운 교포들은 물론이고 자동차로 1∼2시간 거리에 떨어져 사는 동포들도 이 시장을 찾기 일쑤다.
동경 시내「아까사까」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는 한국인들은 대부분 이 시장에서 장을 본다.
「오까찌마찌」에 한국시장이 들어선 것은 36년 전. 일본의 패전으로『징용에서 풀려났으나 미처 귀국선을 타지 못한 동포들이 동경의 관문인「우에노」의 근처에 정착하면서 생겨난 것』(이진호 민단동경지방본부단장의 말)이다.
처음 이곳에 자리를 잡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떠났고 시장모습도「바라크」촌에서 깨끗한 상가로 모습을 바꾸었으나 교포가 경영하던 상점은 다른 교포가 인계 받아 한국인 상가의 특성을 그대로 살려왔다.
현재 이 상가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일본사회에서도 뒤지지 않는다.

<조총련 입김 약해져>
평당 1천만「엔」(약3천 만원)에 가까운 상점이 대부분 자기 소유이고 그밖에「빌딩」이나 주택을 몇 채씩 갖고있는 교포도 한두명이 아니다. 식료품상을 하는 강은순씨의 경우 하루매상이 50만「엔」이 넘고 따로 무역회사를 차려 취급하는 물건의 40% 정도를 한국에서 직접 수입해다 팔고 있다.
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돈만 하루 몇 천만「엔」이 넘는다는 교포들의 얘기다.
한때 조총련의 장난으로 분위기가 흐려진 적도 있으나 성묘단의 모국방문운동 등 정부의 노력으로 지금은 이 일대 대부분의 교포가 민단으로 전향, 밝은 내일을 향해 발 돋음하고 있다.
일본관동지방의「한국시장」이「오까찌마찌」라면「이꾸노」는 일본관서지방의 「한국시장」이다.
「오오사까」시「이꾸노」구「미유끼·도오리」상점가라고 하면 웬만한「택시」운전사면『아! 한국시장 말입니까』고 선뜻 대답한다.
동경의「오까찌마찌」시장이 종전 후 생긴데 비해「오오사까」의「이꾸노」시장은 30년대 말부터 시장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한국인이 많이 살고있는 이곳에 한 일본인 장사꾼이 중앙도매시장에서 팔다가 남은 물건을 값싸게 팔기 시작한 것이 장이 선 계기였다고 50년 간 이곳에 살고있는 김악수씨(83·한약방 경영)는 당시를 회상했다.
이곳이 본격적인「한국시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49년의「4·3사태」때 일본으로 건너 온「제주도 사람」들이 몰려 살면서부터였다.
그 들은 이곳에서「코리아·타운」을 만들어 나갔다.

<한인학교 없어 불편>
상혼에 밝은 그들은 일본인 상점을 하나씩 하나씩 인정해 지금은 2백여 점포 중 3분의2가 한국인에 의해 경영되고 있다.
「이꾸노」시장 상권이 이들 손에 들어가면서 조총련의 마수도 줄기차게 뻗쳤다. 「제주사태」라는 약점 때문에 조총련의 선전은 쉽게 먹혀 들어갔다.
『70년대 초반만 해도 조총련계 세력은 80%나 되었다』는 2세 동포 김재문씨(41·음식점 「파고다」주인)의 얘기다.
그러나 75년의 재일 동포 모국방문 운동 후「이꾸노」도 봄을 맞고있다. 한국을 다녀온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이꾸노」의 색깔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아무개가 평양엘 갔다 오더니 벙어리가 되었더라』,『내 딸은 죽어도 북송선엔 태울 수 없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갈 때는 한 가닥 두려움도 있었지만 한국에가 성묘를 하고 돌아온 기쁨, 그리고 고국에서 친척을 만나본 감격 등으로 가득 찬 얼굴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이래서 조총련에 매여있던 교포들이 전향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세력판도는 60대40으로 우리가 우세하다』는 민단분석이다.
「오오사까」의「38선」이라는 말은 이미 없어졌다.
모두의 생활도 윤택해졌다. 그러나 50년이라는 긴 세월, 이 민족의 설움은 물론 조총련의 붉은 마수도 끝내 견디어 낸 김악수 할아버지는 이곳에 한국인학교가 세워지는 것을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이꾸노」의 일본 국민학교「기따쓰루하시」소학교는 한국인 학생수가 60%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일본학교인데도 1주일에 1시간은 한국역사와 한국말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 학교는 아직도 없다. 『적어도 국민학교 때만큼이라도「한국」을 심어줘야지요….』김악수 할아버지 뿐 아니라 모든 교포들의 소망이다. 【글·사진=신성순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