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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치한 포기의 행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얼마전 일이다. 입맛을 잃고있는 그이를 위해 오랜만에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갔다. 겨우 내내 식탁에 올린 김치찌개에 실증도 났으리라. 무언가 신선하고 상큼한 것을 마련하여 입맛을 살려주어야지.
먼저 눈에 뜨인 것이 싱싱한 푸른 잎의 상치였다. 제철이 아닌 탓인지
값이 한 근에 4백원이나 했다. 그래도 한번의 별미정도로 생각하고 상치를 사서 저녁식탁을 마련했다. 몇 잎 되지 않는 것이어서 나 자신은 먹어볼 엄두도 내지 못한채 귀가해 즐거워할 그이의 모습을 생각하며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런데 기다림의 보람도 없이 그이는 외식을 하고 늦게 귀가한 것이 아닌가.
상치는 아침상으로 미루었지만 아침 식탁에 상치가 무슨 별미일 수 있을까.
단돈 4백원의 기대가 너무나 큰 실망으로 변하고 말았다.
여기서 학창시절의 거창했던 꿈을 들먹거리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괴테」와 「바이런」을 읽으며 구름같이 아름다운 꿈을 쫓던 나 자신의 모습과 지금의 나 자신은 얼마나 이질적인 모습인가. 유행에 민감하며 철 따라 새 옷을 해 입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싼 물건 찾으러 시장을 몇 바퀴 도는 아낙네로 변하고 말았으니….
그러나 아침식탁에 앉은 그이의 한마디에 모든 실망과 처참했던 생각이 깡그리 사라지고 만다.
『당신의 겉절이 솜씨는 일품이야….』
상치쌈 대신 만들어 내놓은 상치 겉절이를 맛있게 먹는 그이를 보며『행복이란 구름 같은 꿈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로구나….』
그래서 나는 다시 알뜰한 생활인으로 보람을 느끼며 살게 되나보다. 【김영미(서울 동대문구 묵동 242의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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