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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아침 깜짝 물결무늬 풍뎅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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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깜짝 물결무늬 풍뎅이/구효서 지음, 세계사, 9천5백원

1987년 단편소설 '마디'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소설 창작에 전념, 5권의 소설집과 8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하며 한국 소설의 허리를 가장 튼실하게 떠받치고 있는 중견 작가 구효서씨의 신작 소설집.

현실 비판이든, 사랑에 대한 아픔이든 그 주제에 딱 들어맞는 구성과 문체를 매번 새롭게 선보이는 장인 정신에 충실한 작가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11편의 단편도 딱히 주제를 뭐라고 묶기에는 편편이 다 다르다. 단 21세기 정보화 시대를 고향도 가정도 없이, 묶인 직장도 없이 살아가는 '신유목민'으로서의 현대인의 고독한 삶과 사랑의 정황이 아프게 흐를 뿐이다.

베링 해협에서 얼음 덩어리를 타고 형제가 함께 고기잡이를 했다. 얼음이 깨져 한 명은 알래스카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돌고 한 명은 시베리아로, 중앙 아시아로, 다시 한반도로 수수만년 떠돌다 형제는 우리 시대 다시 유목민으로 만난 것인가.

미국으로 출장 간 40대 남자와 그곳에서 우리와 똑같은 혈통과 풍속의 인디언 마을로 안내하던 스무살의 한국계 처녀 가이드. 나이를 훌쩍 뛰어넘는 유목민적 사랑으로 표제 소설은 빠지는가 했더니 그 처녀는 20여년 전 헤어져 외국으로 유학 간 옛 애인과의 사이에서 난 딸이었다.

그 딸을 키운 건 '세상의 구름과 바람과 하늘, 무엇보다 세월이었고 부모는 아니었다'며 인연은 물론 시공을 초월해 자라고 사는 자유분방한 신세대적 삶의 정황을 '아침 깜짝 물결무늬 풍뎅이'는 보여주고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 사랑의 현장인 이탈리아 베르나에는 '이곳 광장에서 만나자 해놓고 나타나지 않으면 절교의 표시다'는 속설이 전한다. 그곳으로 30대 중반의 남자는 유학 떠난 아내를 만나러 가나 아내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동네 수퍼로 장보러 가듯 지갑만 달랑 챙기고 슬리퍼를 끌고 남편과 가정을 떠나 이곳에서 수년 간 머무르다 지금은 미국 남성과 동거하고 있다는 한국 여성을 만나 서로의 고독을 위무하려 몸을 섞으려다 헤어진다는 게 '철갑나무가 있는 광장'이다.

이렇듯 11편의 작품 주인공들은 이혼 남녀거나 독신들로 또 사랑을 찾아 떠돈다. 그 떠도는 수평의, 자유의 길에 가끔 수직의, 붙박인 나무들이 나온다.

'거친 바람이 불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떠나는 혈육에게 흔드는 늙은 아비의 슬픈 작별의 손짓 '같은 미루나무처럼 변함 없는 애인과 아버지를 잃은 한 독신녀의 상실감을 '가을비'는 다루고 있다.

수평적 유목의 시대, 고향과 뿌리의 수직적 세계에 대한 그리움은 '검은테떠들썩팔랑나비'에서는 홰나무의 환각으로 구체화된다. 고향에 내려가 6백년된 홰나무를 주인공은 고향 친구들과 함께 분명 보았다.

그러나 그 나무는 몇년 전 베어진 나무였다. 공동체로서의 마을의 삶을 온전히 지켜오던 그 홰나무를 분명 보고 앉고 매달리고 했던 친구들은 그 날 '보았을 수도 안 보았을 수도 있다'며 얼버무린다. 순간적인 것도 영속적인 것도 없이 뒤섞여 사는 게 우리네 삶 아니냐며.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존재와 삶의 이유를 밝히려들지 않는다. 대신 21세기의 떠도는 삶과 그래도 잃어서는 안될듯한 뿌리에 대한 갈망이라는 이율 배반을 장인적 소설 구성으로 결국 한 인물, 한 이야기로 귀결시키며 읽는 재미와 함께 신유목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우리 독자들은 과연 뭐냐고 묻고 있다.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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