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유족 앞에 가로막힌 세월호 합의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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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깊은 늪에 빠졌던 국회가 한 발짝 앞으로 움직이는가 했더니 세월호 유족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여야 원내대표는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어제 세월호특별법안을 합의해 의원총회에 추인을 요청했지만 새정치연합 의총은 세월호 유족의 눈치만 보다 추인을 보류했다. 유족들은 이날 저녁 “여야 원내대표의 특검 추천에 관한 합의를 반대한다. 재협상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세월호특별법안은 지난 7일 있었던 ‘이완구-박영선 1차 합의’를 새정치연합 의원총회가 나흘 만에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길을 잃었다. 야당은 전가의 보도처럼 ‘법안 연계전략’을 꺼내들어 중요하거나 시급한 다른 법안들마저 표류시켰다. 이 과정에서 박영선 비상대책위원장의 리더십은 땅에 떨어졌고 새정치연합의 친노나 486세력,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의 ‘운동권적 투쟁정치’가 비난받았다. 제1야당의 무신뢰·무책임 행태는 국민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게 될 것이다.

 어제 타결 직전까지 갔던 ‘이완구-박영선의 2차 합의’는 1차 합의 때보다 유족과 야당 입장에 훨씬 가까이 간 안이었다. 새누리당은 거의 백기항복 하다시피 양보했다. 특별검사 추천위원회는 7명으로 구성되는데 상설특검법과 국회규칙상 여당 몫으로 돼 있는 2명을 선정할 때 야당과 유족의 사전 동의를 받겠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야당과 유족의 실질적인 추천 몫이 과반수인 4명으로 늘어나 특검을 사실상 유족이 지명하는 형국이 된다. 야당과 유족은 특검 이전 단계로 1~2년 활동하게 될 진상조사위 17명에서도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세월호의 진상조사와 수사·처벌에 관한 한 유족이 거의 완벽하게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구조다.

 새누리당이 이렇게 파격적으로 양보한 안에 대해서조차 유족이 반대를 천명하고 야당이 합의안 추인을 미룬 건 유감이다. 유족들은 국회규칙상 2명을 여당이 추천하게 돼 있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유족들은 여당이 2명에 대한 형식적인 추천권조차 포기하고 이를 유족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진상조사위에 4명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주장했다. 유족들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에게 유족대책위가 가이드라인을 줬는데 이완구-박영선 합의안에서 관철되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유족의 아픔을 십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유족들의 태도와 입장은 수용하기 어렵다. 국가의 입법권은 엄연히 국회에 있는데 원내 1, 2당 대표가 두 번에 걸쳐 합의한 내용을 무시하는 정도가 지나치다. 이완구-박영선 합의안의 근거법인 상설특검법은 지난 6월 여야의 합의로 특검추천위원 중 4명을 국회가 지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2명을 유족이 추천해야 되겠다거나 4명을 진상조사위가 추천해야겠다는 주장은 명백히 위법적이다. 새정치연합도 원내 130석을 가진 거대 정당으로서 주어진 입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유족을 설득하지 못한 야당이 실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