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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처럼 30년을 그 자리에…도어맨이 목격한 한국 현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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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최○○·이○○·박○○…. 정재계와 관계 등을 아우른 유명인사 이름 100개가 적힌 리스트. 이름 옆 빈 칸에 빠르게 차종과 차 번호, 그리고 직함을 적어 내려간다. 렉서스 XXXX 모 그룹 회장, 에쿠스 XXXX 전 검찰총장, 에쿠스 XXXX 모 부처장관, 롤스로이스 XXXX 모 그룹 회장, 체어맨 XXXX 모 그룹 회장….

도어맨을 비롯해 리츠칼튼서울 컨시어지팀 소속이라면 누구나 최소한 1년에 두 번씩은 이렇게 호텔 VIP고객 차 번호를 외우는 시험을 본다. 이렇게 이름이 문제로 나오기도 하지만, 어쩔 땐 사진 100개를 던져주기도 한다. 사진 속 얼굴을 보고 차 번호를 알아맞추는 거다. 자기 가족 휴대폰 전화번호도 못 외우는 디지털 치매 환자가 널린 세상에서 호텔리어, 특히 도어맨에겐 아직도 이렇게 고객 차량 번호 외우는 게 필수다.

손광남(57) 역삼동 리츠칼튼서울 도어데스크 수퍼바이저(계장). 지난 15일 광장동 쉐라콘그랜드워커힐 강영수 지배인이 은퇴하면서 그는 이제 여의도 콘라드 호텔 권문현 주임과 함께 국내 호텔업계에서 가장 경력이 오래 된 도어맨이 됐다. 팀내 최고령이기도 하다. 기억력이 퇴화할 법도 하지만 시험을 볼 때마다 직원 300여 명 가운데 늘 상위권이다. 100문항을 거의 다 맞춘다. 지금도 매일 아침이면 영어 단어 외우듯 신문을 뒤적이며 고객 얼굴과 관련 정보를 외우고 또 외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벌써 30년째. 그러니 그의 머릿 속에 저장된 고객 차량관련 정보가 3000여 개라는 그의 설명을 믿을 수밖에.

사실 호텔리어로서의 커리어는 30년도 더 된 1977년 시작됐다. 다들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 그의 집안 형편 역시 안 좋았다. 특히 고2 때인 74년 월남 파병 갔다 미군 부대 기술자로 일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4남매(1남3녀)의 둘째였던 그가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학교는 당연히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1~2년 방황하며 뭘 할까 고민하다 국제관광공사(현 한국관광공사)의 관광종사원 자격 시험을 봤다. 호텔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호텔리어는 당시 생소한 직업이었지만 우연히 멋진 제복의 코리아나호텔(72년 개관) 도어맨을 본 게 계기가 됐다. 광화문에 있는 호텔학원에 다니며 시험을 준비한 끝에 5개월 만에 합격(사진)했다.

“요즘 입시학원을 생각하면 돼요. 매일 5~6시간씩 수업을 받았어요. 시험은 필기와 면접으로 나뉘는데, 면접에선 기본적인 외국어 실력과 함께 외모도 봤어요. 지금은 좀 살이 빠졌지만 젊은 땐 체격이 좋았거든요. 키도 178㎝로 당시로선 큰 편이었잖아요.”

수료증을 받자마자 태평로1가 뉴국제호텔에 입사했다. 솔직히 처음엔 도어맨을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처음 배치 받은 부서도 식음업장이었다.

“한겨울에 입사했는데 솔직히 도어맨은 불쌍해 보이기만 하더라구요. 추운 날씨에 바들바들 떨면서 하루 종일 밖에 서 있으니까. 지금처럼 야외 히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도어맨이 좋아 보이는 거에요. 솔직히 식음업장이 고되기도 했고.”

뉴국제호텔은 당시 최고의 호텔로 꼽히던 곳이지만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했다. 지하부터 식당이 있는 1, 2층까지 맥주나 음료수를 몇 박스씩 등에 짊어지고 옮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화려한 줄 알았던 호텔리어의 삶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2년 만에 호텔을 그만두고 고향 청주로 갔다. 새 인생을 살기 위해서였다. 고향에서 기아산업(현 기아자동차)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비포장 도로를 달리며 충청도 구석구석을 누볐다. 당시엔 정미소나 양조장·운송업체 사장이 재력가들이라, 주로 이들을 상대했다. 많이 팔 때는 봉고차를 한 달에 15대 넘게 팔기도 했지만 영업 특성상 수입이 거의 없을 때도 있었다. 이건 아니구나, 싶었다. 그는 다시 호텔을 떠올렸다.

이 사이, 81년 손씨는 사내 커플이었던 프론트 수납원(캐시어) 출신 아내 이인자(58)씨와 1년여 장거리 연애를 한 끝에 크라운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아내가 서교호텔로 옮기자 몇 개월 후 손씨도 같은 호텔에 입사해 웨이터로 일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실내에서만 일하는 웨이터 생활 역시 활동적인 그의 성격과는 잘 맞지 않았다. 그는 84년 역삼동 남서울호텔(현 리츠칼튼서울)로 옮겨 도어맨 생활을 시작했다. 아내는 비슷한 시기에 해밀턴호텔로 옮겼다가 이후 전업 주부가 됐다.

“남서울호텔은 그 전에 일하던 호텔보다 훨씬 규모가 큰, 잘 나가는 곳이었어요. 강남 최고 호텔이라 대통령 친인척을 비롯해 힘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들었죠. 군사정권 시절이라 군인들도 참 많이 왔어요. 사우나와 피트니스센터가 정말 유명했죠.”

과거 호텔 경력은 그가 도어맨을 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혀 다른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번 호텔을 떠났던 경험이 있던 그는 빠르게 적응하려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지금은 호텔 차원에서 고객 차량 정보 암기 시험까지 보지만 당시엔 그 어떤 호텔 도어맨도 고객 정보를 일부러 외우지 않았다. 다들 차 문만 열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달랐다. 고객 얼굴과 차 번호를 연결해 시험공부하듯 암기했다. 5~6개월 지나자 2~3년 일한 선배보다 훨씬 많은 고객 정보를 외우게 됐다.

“한 6개월 지나자 동물적인 감각이 생기더라구요. 사람 얼굴을 보면 차 번호가 바로 떠오르는 거예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호텔에서 직접 만난 고객뿐 아니라 신문에 등장하는 잠재적인 고객 정보까지 외우기 시작했다.

“신문을 펼치면 사회·경제·문화 면까지 꼼꼼하게 살펴요. 그런 생활을 30년 하다 보니 이젠 신문에 나오는 사람 대부분 얼굴을 알아요. 아, 이 양반한테 이런 일이 있었구나, 등등을 외우고 있다가 그 사람이 호텔을 찾으면 먼저 다가가 좋은 소식이 있으면 축하 인사를 건네기도 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화려한 호텔리어. 하지만 다른 업무에 비해 엄청난 박봉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열심히 일하니 손씨를 각별하게 생각하는 호텔 고객이 적지 않았다. 남서울호텔 단골이던 한 기업 회장은 함께 호텔을 찾은 아들과 손자에게 손씨를 “친구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단다. 그러니 재벌 2,3세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늘 이렇게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도어맨을 무시하는 고객도 많았다. 한번은 서비스가 마음에 안든다며 차로 도어데스크를 밀어버리겠다고 협박한 사람까지 있었다.

남서울호텔 시절 기억에 남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86년 아시안게임 무렵 중국 관영매체 신화사 사람들이 묵은 적이 있는데 표 안나게 경호하는 지금과 달리 차량 테러를 막겠다며 큼지막한 1.5㎥ 크기의 콘크리트 블록을 진입로에 쌓아달라고 요청했다. 호텔 측은 실제로 콘크리트 블록 4개를 주문해 로비에 쌓았다. 돌이켜보면 참 무식한 방법이지만, 당시엔 그만큼 중국과 심리적 거리가 있었다.

“내 성격과 잘 맞는다고 생각은 하지만 솔직히 도어맨이라는 직업이 늘 자랑스러웠던 건 아니에요. 한번은 같은 동네 사람이 호텔에 왔다가 저를 보고는 ‘혹시 무슨 무슨 동네 사는 양반 아니냐’고 묻는데, 괜히 저 혼자 자존심이 상하더라구요.”

“회전문 돌기도 전에 차 호출하던 전설의 도어맨, 바로 접니다”
박정희 외 역대 대통령 모두 문 열어 준 경험
외환위기 땐 외국 금융인 몰려 호텔은 호황
퇴근 후에도 고객 차 보면 자동적으로 인사

2012년 작은 딸 주미(왼쪽)씨 졸업식에 모인 가족들. 주미씨 오른쪽으로 손광남씨 부부와 큰 딸 주희씨 부부. [사진 손광남]

그러나 그는 노력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런 그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닥쳤다. 93년 남서울호텔이 리츠칼튼호텔로 바뀌면서 직장을 잃은 거다. 당시 1년 6개월 동안 리뉴얼 공사를 했는데 그는 회사에 부담이 될까봐 먼저 사표를 던졌다고 한다. 그리고 95년 리츠칼튼이 문을 열 때까지 뉴월드호텔(현 라마다서울)에서 도어맨을 했다.

“돌아가고 싶었어요. 리츠칼튼은 당시 호텔리어라면 누구나 일하기를 꿈 꾸는 최고의 호텔이기도 했고, 저한테는 고향 같은 곳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입사시험을 다시 봤죠. 면접 보러 가니 유학파가 엄청 많은 거예요. 외국어 실력은 물론이요 학벌 등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으니 위축됐죠. 그래도 일에 대한 자긍심은 있었어요. 그걸 인정받았는지, 합격했습니다.”

사실 그의 리츠칼튼 합격은 그 자신보다도 호텔이 더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만의 독특한 도어맨 서비스로 장안에 화제가 됐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손씨는 손님 정보를 그저 외우는 걸로 그치지 않았다. 손님이 로비에서 걸어나오면 요청하기도 전에 그 고객 차량번호를 부르며 차를 호출했다. 회전문이 다 돌기 전에 고객 차량을 호출한다는 소문이 나서 다른 호텔이 벤치마킹하러 올 정도였다.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다. 웬만하면 고객이 직접 휴대전화로 미리 운전사를 부르기 때문에 도어맨이 고객 얼굴만 보고 차량 번호를 바로 외우는 게 별다른 장점이 아니게 된 거다. 게다가 이젠 차를 여러 대 보유하거나 자주 바꾸기도 해 외운 정보가 금세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외우고 또 외운다. “시대가 달라져도 이게 도어맨의 기본 능력이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30년 동안 호텔 정문을 지키다보니 유명인사란 인사는 전부 만나봤다. 역대 대통령 중엔 고(故) 이승만·박정희 대통령만 빼고 전부 문을 열어줬다.

“재임 당시는 아니고 재임 전후였죠. 김영삼·고(故) 노무현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과는 악수도 했어요. 이렇게 역대 대통령을 모두 만난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요. 아, 기업 총수도 많이 만났죠. 호텔이 성공한 사람들이 오는 곳이잖아요.”

그는 계속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호텔은, 아니 우리 사회는 변화를 거듭했다. 오랜 세월 한 자리에서 역사의 영욕을 다 목격한 고목처럼 그도 우리 현대의 굵직굵직한 현장을 많이 목격했다. 86년 아시안게임이나 88년 서울올림픽 등 경사도 있었지만 97년 외환위기처럼 어려울 때도 있었다. 나랏돈이 거덜난 상황이면 호텔도 어려웠을 것 같은데 그의 회고는 전혀 다르다.

“인수합병(M&A)으로 각국 금융가들이 한국에 많이 왔잖아요. 그때 리츠칼튼에 많이들 묵었어요. 국민들은 어려웠지만 솔직히 호텔은 호황을 누렸어요.”

호텔이 호황이라고 그의 월급이 올라간 것도 아니지만 국민들이 다들 힘들어하는 시기에 북적이는 호텔에 근무한다는 게 내심 미안했다. 하지만 동시에 어려운 시기에 일을 할 수 있어 고맙기도 했다.

“솔직히 우리 일(도어맨)이 힘들어요. 가끔씩 창피한 순간도 있었지만 긍지가 없다면 절대 오래 못할 직업이죠. 후배들한테 농담처럼 ‘일 끝나고 배 안 고프면 오늘 일 제대로 안 한 것’이라고 늘 말합니다. 호텔에 오는 모든 손님한테 인사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당연히 체력 소모가 클 수밖에 없죠. 게다가 난 온 몸으로 인사합니다. 고객은 진심을 알아보니까요. 시켜서 하면 절대 못합니다. 내 일에 대한 자긍심이 있어서 저절로 되는 거지. 내가 그렇게 하니까 이젠 다른 직원도 따라 합니다. 가끔 다른 호텔에 가보는데, 반경 2~3m밖에 안 움직이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우리는 뛰어다녀요.”

그는 체력을 키우기 위해 지금도 근무가 끝나면 매일 30분씩 직원 전용 피트니스 클럽에서 운동한다. 일과 전엔 고객 정보 외우고, 일과 후엔 체력 관리하는, 진정한 프로다. 그러다보니 가끔 퇴근 후 길에서 고객 차를 발견하면 무의식적으로 인사를 하기도 한다.

이런 아빠를 보며 자라서였을까. 그의 큰딸 주희(32)씨도 호텔리어가 됐다. 웨스틴조선호텔 객실예약과에서 근무한다. 아버지의 영향이 컸단다.

“도어맨은 호텔에 가면 처음 만나는 사람이잖아요. 전 아빠가 리츠칼튼호텔의 얼굴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잘 생기기까지 했으니 호텔에 더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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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송정 기자 asitwer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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