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입에 녹는 산자로 옛 맛을 지킨다-강원 명주군 사천면 노동하리「산자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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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한입 덥석 베어 물면 바삭바삭 소리내는 고소한 찹쌀튀김.
달콤한 조청 위의 포동포동한 밥풀이 혀끝에서 녹는 산자 (일명과줄) 는 개구장이 시절고향의 맛이다.
명절날이건 동네 잔치날 이건 동구 밖 제기차기 조무래기 들 사이에선 언제나 산자를 한움큼 가진 녀석이 왕이었다. 군침도는 산자 한쪽을 얻어먹으려고 제기차기에서 일부러 쳐주던 어린 시절의 추억.
아버지가 잠든 사이 다락에 숨어들어 산자를 훔쳐먹다 방바닥으로 나뒹굴어져 혼 줄이 난 뒤 할머니 이불 속으로 냉큼 들어가면 슬그머니 이불 속에 산자를 넣어주던 할머니. 때문에 과줄에 선 고향생각이 난다.
강원도명주군사천면노동하리.할머니품처럼 따스하게 느껴지는 「산자마을」 . 「높아진 입」때문에 사라져 가는 우리 옛 맛을 고집스럽게 보존하고 있는10여 가구 주민이 살고 있다.
둑길을 따라 마을 안에 들어서면 울창한 대나무 숲사이로 바람을 타고 고소한 과줄굽는 냄새가 코끝에 닿는다.
『과줄 맹그는 법 알려주면 상금 줄라고 왔나?』40년 동안 과줄을 만들어온 이원섭할머니(82)는 이 마을 과줄제조의 원조.
뜨끈뜨끈한 온돌방에 아들·며느리· 손자·손녀가 다 모였다.
쌀바탕 (찹쌀을 쪄서 만든 가로10㎝·세로8㎝의 떡)을 만들기 시작한다.
차지게 다진 찹쌀반죽을 안반 위에 올려놓고 칼국수 밀 듯 얇게 밀어 반듯반듯하게 잘라낸다. 밑에 달라 불지 않게 연방분가루를 칠하는 여섯 살 짜리 손자 놈의 손놀림이 재법 날래다.『과줄이 과자로는 상우두머리 엿제. 푸시시 불어나는 과줄처럼 집안살림 불라고 잔칫상 가운데엔 무시로 과줄이 놓여 있었구마. 』 이 할머니는 자기도 혼례를 울리고 시댁으로 갈매짐꾼에게 오색산자를 한쟁반 지워갔다 고 회상한다.
과줄은 지금도 잔치상·회갑상·돌상·젯상 등 큰 차림상의 모양내기 물. 육탕· 어탕· 자반·육전· 밤· 대추 등 산해진미로 상다리가 휘어져도 과줄이 안 놓이면 볼품이 없다.
과줄의 맛은 아낙네의 정성에 달려있다. 길· 흉사 어느 차림상에도 오르는 음식이나 만드는 이의 정성이 제일이라고 이할머니는 힘준다. 과줄 한접(1백개) 을 만들려면 꼬박 하루가 걸린다.
한 열흘 물 속에서 푹 불린 찹쌀을 발 방아로 으깬 뒤 가는체로 쳐서 가루를 만든다.
미리 준비해둔 뽀얀 콩물에 찹살가루를 배합, 반죽을 한다 음 가마솥에 넣고 2시간쯤 찐다.
콩물이 밴 찹쌀가루가 알맞게 쪄져 차지게 엉겨붙으면 이것을 얇게 밀어 잘라낸 것이「찹쌀바탕」 이다.
말랑말랑한 찹쌀바탕은 하루이상 볕을 쬐어 말려야 한다. 씹으면 바삭바삭 소리가 날만큼
화덕 위에서 위세 좋게 끓어오르는 옥수수기름에 바탕을 집어넣는다. 모양을 버릴세라 젓가락으로 바탕의 대 모서리를 집어 끓는 기름 속에 살포시 집어넣는다. 바탕은 뻥 튀김 불어나듯 3배 이상 보글보글 불어난다.
노랗게 콩기름에 배어 알맞게 튀겨진 바탕 위에 조청으로 바르고 밥풀튀김으로 옷을 입힌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밥풀에 빨강·노랑·파랑등의 물감을 들였으나 유해색소 시비로 요즘은 휜 과줄만 만든다.
『티끌 들어갈 세라, 문데기 (먼지)들어갈세라, 보통 조심하는 것이 아녀. 질금 (엿기름) 들어가면 찹쌀의 차진 기운이 삭아버리기 때문에 도로아미타불이 되제』오늘의 첫 작품을 시식하는 이 할머니의 표정이 만족스럽다.
해방이후 10여년 간만 해도 과줄은 큰상차림용 뿐만 아니라 눈깔사탕· 엿 등과 함께 군것질 삼총사로 각광을 받아왔다.
『요즘에 와서는 입맛들이 변해서인지 제사상이나 잔치상에서조차 과줄찾아보기가 힘들어』
이봉춘할머니(60인)는 아무래도「명주산자」의 명맥이 끊어질 것 같다고 우울해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곳에서 생산되는 과줄만은 주문진·강릉 등으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
가격은 한접에 3만원. 온 가족이 달려들어 열심히 만들면 한달에 10접은 팔 수 있다. 인건비야· 개산 할 수 없지만 엿기름·조청 값·찹쌀 값으로 반이 나가고 월 평균 순 수입은 15만원 정도다. 이 수입으로 그저 자녀들의 잡비·교통비·학비를 해결한다.
이마을 이장 임두재씨 (52)는 자꾸만 좁아지는 판로 때문에 경제성도 떨어지지만 언젠가 끊어질 전통적인 산자 제조법 보존이 시급하다며 근심이 태산 같다. 【명주=김창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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