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학만세" 47세에 대학합격|"무학자"의 설움 달래려 각고1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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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꿈에도 그리던 사각모를 이제야 써보게 되나 보군요. 비록 늦긴 했어도 젊은 사람 못지 않게 열심히 하렵니다』-.
두 아들의 아버지로 대학합격의 영광을 안은 47세의 만학도는 흥안 소년처럼 활짝 웃는다.
30일 국민대상경계열 합격통지서를 받아 쥔 한은희씨(서울 성내동l61의182).
올해 대학 진학생 중 최고령자이기도 한 그의 예비고사성적은 2백21점, 내신성적은 2급.
점수야 대단하진 않지만 그에겐 오늘의 영광이 여간 대견스러운게 아니다.
세 식구의 가장으로서 독학으로 중입·고입·대입자격 검정고시를 거친다는 것은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이 독학이지 실상 나이 들어 밤늦도록 국어자습서나 수학문제지를 펴놓고 씨름하기란 차라리 죽기보다 더 어려웠던 것 같아요.』
낮에는 생활인으로서 서울 구의동에 새로 차린 「와이셔츠」마춤집 「나이프」양복점 일을 거들어야했고, 밤엔 늦게까지 「라디오」에 귀를 기울여가며 교육방송 듣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씨의 고향은 수복지구인 경기도 연천 백학읍내. 그는 고향마을에서 백학국교를 나와 왕징중학3학년에 재학하던 중 6·25동란이 터져 고향을 등지고 피난길에 올라야했다.
수복 후 고향을 되찾긴 했지만 그의 학력관계서류는 6·25가 깡그리 불살라버린 뒤였다. 그가 졸업한 국민학교와 다니던 중학교는 모두 폐쇄돼 자신의 학력을 찾을 길이 없었다. 본의 아니게 무학자가 돼버린 것이다.
당시 15세 소년이었던 그는 잃은 학적을 되찾기 위해 이북5도청에 찾아가 애원도 해보았지만 헛수고였다.
피난터를 전전하며 향학의 길을 불태웠으나 졸업증명이 없어 받아 주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공사장 인부로 떠돌아다니면서도 강의록만은 놓지 않았다.
한때 군 간부후보생에 지원했지만 역시 학력미달로 제외됐다.
모든 것을 체념한 한씨는 62년 5급 공무원 임용시험에 합격. 인천교도소의 교도관이 됐다. 68년에는 세무직 시험에 합격해 77년3월까지 서울시내 각 세무서에서 근무하다 지병인「류머티스」관절염으로 사직했다.
그러나 항상 그를 괴롭히는 것은 병보다 「무학자」라는 꼬리표였다.
그러던 중 71년 갓 결혼한 부인 염문자씨(40)가 『다시금 공부해보지 않겠느냐』며 의기소침해있던 한씨를 독려했다.
한씨의 만학의 길은 이때부터 다시 시작됐다.
실로 28년만에 손에 쥐어보는 국민학교 교과서이긴 했어도 그렇게 생소하진 않았다. 하루하루 한씨는 자신을 채찍질해가며 조금도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75년4월 중학교 입학자격검정고시에 합격한데 이어 79년4월엔 고교입학자격증을 따낼 수 있었다.
이미 나이 45세가 된 한씨.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았고, 직장마저 그만둔 뒤라 생활은 어려워져갔으나 끝내 좌절하지 않고 독학을 계속, 그해 8월 대입자격검정고시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80년1월 중앙대 경영학과에 원서를 냈으나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했다.
올해로 두번째. 당초 복수지원은 생각지도 않은 한씨는 국민대 상경계열에 응시, 비로소 못내 그리던 사각모의 꿈을 실현하게 된 것이다.
건평 20평의 자그마한 양옥. 공무원 생활을 그만둘 때 받은 퇴직금으로 마련한 이 보금자리에서 한씨는 부인 염씨와 1남 정균(11·길동국교3년) 2남 승균(7)군 등 두 아들을 돌보며 묵묵히 면학의 길을 다져왔다.
『「해야한다」는 마음가짐만 돼있으면 어떤 난관이라도 극복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새로운 인생설계에 부푼 한씨는 후배들을 위한 위로의 말도 잊지 않는다. <전종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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