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정선아리랑」사연 담긴 물레방아는 돌고 돌아|정선군 화암리 「물레방아 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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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쿵덕쿵, 쿵덕쿵.』
「정선아리랑」의 구성진 가락을 타고 물레방아가 돈다. 남한강계곡의 차디찬 물살이 영롱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곤두박질하는 강원도 정선군 동면 화암리「물레방아마을」.
숱한 남녀의 눈물과 한숨이 서린 정선의 물레방아는 아리랑과 짝을 지어야 옛일을 들려주는 세월의 바퀴다.
『물레방아는 사시장철 물살을 안고 도는데/우리 집 서방님은 날 안고 돌줄 왜 모르나/노랑머리 다부리상투(억지로 틀어 올려 짠 어린아이 상투)를 언제 길러 내낭군 삼나/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40년을 불러온 나창주옹(62·정선아리랑 기능보유자)의 애조띤 가락이 가슴을 앓게 한다.
『한 2백년쯤 전 얘기여. 스무살 넘은 과년한 큰애기가 여덟살 도련님에게 시집을 갔지. 시집살이는 고되고 코흘리개 신랑은 수년이 지나도 구실을 못할거여….』다람쥐도 쉬어 넘는다는 「다람쥐 한숨바위」에 눈을 둔 나옹은 아리랑에 얽힌 전실을 이렇게 시작한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잠든 서방님 곁에서 밤마다 이리뒤척 저리뒤척 속을 태우던 새색시는 달 밝은 어느날 밤 조양강을 찾았다.
차라리 한목숨 끊어 세상을 하직하자며 치마를 쓰는 순간 강건너 달빛 속에 하얀 물살을 일으키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물레방아에 시선이 멈췄다. 『생명없는 것들도 둥글게 어우러져 서로 만나 조화를 이루는데 우리 서방님도 언젠간 낭군 구실을 하겠지.』 돌아가는 물레방아에서 세상이치를 깨달은 새색시는 죽음을 포기하고 가슴 맺혔던 한을 노래로 풀었단다.
때문에 정선아리랑은 체념의 노래가 아니라 기다림의 노래요 은근한 끈기의 노래다. 골짜기의 물이 마르지 않는 한 쉼없이 돌아가는 물레방아 내력과 너무나도 걸맞다. 정선아리랑은 물레방아가 있어야하고 물레방아는 아리랑의 사연이 있음으로 해서 생명력을 갖는다.
화암리 일대의 물레방아는 모두 30여기. 단위마을로는 가장 많은 편으로 도의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그림바위(화암)골에서 3대째 물레방아를 돌리고 있는 최종호 할아버지(64)는 『물레방아가 콸콸 돌면 가슴의 피가 뛴다』고 한다.
『물레방앗간이 옛날엔 젊은 남녀들의 밀회장소였어. 나도 방앗간 지붕 위에 박꽃이 피고 달빛이 쏟아지는 밤에 요즘 말하는 「데이트」를 했었지, 허허허.』 최 할아버지는 몇십 만원 들이면 전기 발동기로 바꿀 수 있지만 자신의 인생을 고스란히 싣고 있는 물레방아이기에 이내 함께 늙을 결심이란다.
떡쌀 1말 찧는데 10여분, 새벽6시부터 해질녘까지 70여말을 찧는다. 1말 값이 1천2백원으로 물레방앗간의 한달 평균수입은 30여 만원. 아직도 정정한 노모를 모신 최 할아버지는 여섯 식구 시골생활이 그만하다고 한다.
물레방아의 역사는 『고려사』에서 공민왕 11년에 단 한번 기록되어 어렴풋이 고려 때부터 이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료도 이조정조23년『일생록』에 『진단(단향목)으로 만들며 재료 구하기가 힘들어 보편화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원형의 크기 같은 것은 좀처럼 밝혀내기가 어렵다.
정선아리랑 보존위원회 전태화 부위원장(67)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낡아 부속을 여러번 가눈 바람에 원형이 보존된 것은 없으나 정선의 물레방아가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라고 한다.
물레방아와 거의 역사를 같이하고 있는 정선아리랑은 현재 체계화된 가사만 5백곡. 유배당한 선비의 우국충정,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과 이별의 슬픔, 인생의 무상, 자연예찬이 대종을 이룬다. 70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보존위원회(회장 홍태식·62)가 발족, 아직 숨어있는 구전가사 찾기를 벌이고 있다.
선조들의 숨결이 어린 물레방아와 민요를 함께 간직한 주민들은 세월이 변해도 다정다감한 인심이 변치 않는다고 한다. 음력설을 엿새 앞두고 산골의 물레방아는 쉴새없이 힘차게 돈다. <정선=김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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