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우리조상 묘다"…사돈간 송사 4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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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사돈지간인 두 문중이 5백년 된 묘소 하나를 놓고 서로 자기 조상의 산소라고 주장하는 「뿌리 찾기 송사」가 4년만에 판가름이 났다. 대법원 민사부는 20일 남양 홍씨 창사공파 문중(대표 홍정철·경북 군위군 군위읍 내량동667)이 효령사공씨 문중(대표 사공협·군위군효령면 성동)을 상대로 낸 석물 철거 소송 상고심 선고공판에서 원고 측의 주장을 인정, 사공씨 문중은 묘소 앞의 상석 등을 철거하라고 판결했다.
이로써 사공씨들은 자기들의 조상산소로 생각하며 15년간 제사를 지내온 묘소 앞의 상석·비석·잔대석·향로석 등 석물을 철거해야 할 판.
문제의 묘소가 있는 곳은 경북 군위군 군위읍 외량동 송현산 중턱. 다섯 손가락을 닮아「오지형산」이라 불리는 야산으로 길에서 4백m쯤 올라간 이른바 명당. 산의 소유주는 홍씨 문중으로 문제의 산소에서 19m아래에는 홍씨문중 l8대 공동시조인 창사공 홍리강의 부인사공씨 무덤이 있고 그 15m아래에는 11대조인 홍중우의 부인 연안 이씨의 묘소가 있다.
창사공의 부인 사공씨는 바로 사공씨 문중에서 찾고있는 조상 사공민의 막내딸. 따라서 후손들인 홍씨와 사공씨는 서로 사돈간인 셈이다.
홍씨 문중에서는 문제의 산소가 현재의 문중 대표 홍순철씨의 15대 조인 홍주의 묘라고 들보고 있었던 것. 홍씨 측은 홍주의 후손이 끊겨 문중에서 별초정도만 해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공씨 문중에선 이름난 조상중의 한 분인 시중공 사공민의 무덤을 못 찾아 문중의 수치로 여겨오던 중 15년전 이 묘를 찾아 그들이 찾던 조상의 묘소라며 해마다 극진히 제례를 올려왔다.
사공씨 문중에서는 세보에서 사공민의 묘가『송현 오지형 남양홍씨 묘상』이란 문구를 찾아냈기 때문. 65년 현장을 돌아본 사공씨 문중 대표들은『홍주는 아래에 묻힌 사공부인의 증손자인데 어찌 자손을 조상 위에 역장(역장)으로 봉분도 더 크게 했겠느냐』며 더욱 확신을 갖게됐다.
이때부터 논8백평의 위토(위토) 까지 마련했고 76년11월에는 산소 앞 홍씨의 비석 옆에 사공씨의 석물까지 말끔히 설치했다.
사공민은 고려말∼이조 초의 인물로 최영장군의 사위. 정4품 벼슬인 봉렬대부·사복·소윤 등을 지낸 명신이었다.
그러나 석물을 한 것이 남양 홍씨 문중을 자극했다. 홍씨 측은 77년3윌 문중 회의를 열고『우리조상 산소이니 석물을 철거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사공씨 문중으로 보냈다.
그러나 사공씨 측의 답장은 의의로 단호했다. 사돈지간이라 문장은 정중했지만 내용이 내용인지라 쉽게 결말이 날 수 없었다. 77년6윌 홍씨 문중에서는 대구지법에 석물 철거 소송을 제기했다.
양측은 서로 족보는 물론 영남일대의 유명 문집·지리지 등을 증거로 제시했다.
여기서 홍씨 측이 제시한 유운룡의『겸암 문집』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유운룡은 서애 유성룡의 친형으로 안동 현감 재임시인 1586년 조부 산소를 참배하러가서 이곳을 답사하며 분묘마다 지형별로 나누어 인척관계까지 문집에 기술했던 것.
그의 문집에는『사공민이 사망한지 1백50년밖에 안됐는데 그 산소를 찻을 길 없어 안타깝다』고 쓰여있어 당시 이미 실전(실전) 된 것이 입증되었던 것.
1심인 대구지법은 78년2월『피고가 사공민의 분묘라고 주장하는 이 상석물도 사공씨 종손이 소유·관리·처분권이 있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2심인 대구고법은 80년6월『소재가 확실한 분묘는 좌향(묘의 앉은 방향)을 표시하고 있는데 피고 측이 제시한 문헌 중 사공민의 묘는 좌향 표시가 없다』며 사공민의 묘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1심 판결을 뒤집었다. 이를 다시 대법원이 확정함으로써 두 명문의 송사는 단락지어졌다.
결국 이번 판결로 사공씨 문중은 조상 산소가 아닌 곳에 15년간 제사를 지낸 격이 됐지만 이를 지켜 본 주위에서는 뿌리를 찾으려는 후손들의 끈질긴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권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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