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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와 화합" 교황의 축복 … 대한민국이 위안 얻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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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프란치스코 교황이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순교자 124위에 대한 시복식을 직접 집전했다. 교황방한준비위원회는 입장이 허용된 17만 명과 신자·일반인 70만여 명을 포함해 전국에서 90만 명이 모였다고 밝혔다. [사진공동취재단]

“올해 우리나라에 힘든 일이 너무나 많았는데, 교황의 미소가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진 우리 마음을 싹 씻어주는 것 같았다.”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순교자 124위에 대한 시복식을 직접 본 가톨릭 신자 김광렬(57·세례명 요셉)씨의 말이다. 김포에서 새벽 4시에 출발해 두 시간 뒤 도착했다는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주관한 시복식을 제단 우측에서 지켜봤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며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했다. 이날 광화문을 찾은 사람들은 “가톨릭 신자든, 아니든 상관없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진솔한 모습과 시복식을 통해 위안을 얻었다”고 입을 모았다.

 시복식은 오전 10시를 전후해 교황이 순교자 124명을 복자로 지정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1.8m 제단 양 옆에 설치된 스크린에 복자들의 그림이 나타나자 미사포를 쓴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교황은 강론에서 “오늘은 모든 한국인에게 기쁨의 날”이라며 “순교자들의 유산은 선의를 지닌 형제자매들이 더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화해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 서로 화합하여 일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축복했다.

 광화문 제단에서 멀리 떨어진 데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스마트폰이나 망원경으로 시복식을 지켜봤다. 망원경을 이용하던 원불교 신자 정호중(45)씨는 “교황을 보러 일부러 전북 익산에서 올라왔다”며 “교황의 낮은 데로 임하는 자세는 한국 종교 지도자들이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교황을 보려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지난 14일 입국했다는 모니카 수녀는 “12시간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보통 때랑 달리 시차 때문에 고생도 안 했다”고 말했다. 2주간 한국을 여행하던 중 우연히 교황 방한 사실을 알게 됐다는 독일인 토마스 팩클러(26)는 시청 주변의 한 빌딩 카페에서 DMB로 시복식을 봤다. 서울 상계동에 사는 이광연(54)씨는 집에서 시복식장까지 두 시간 동안 22㎞를 뛰어왔다고 했다.

 이날 광화문에서 시청역 부근 2㎞ 일대는 축제의 중심지였다. 교황방한위원회는 입장이 허용된 17만 명을 포함, 전국에서 90만여 명이 모였다고 밝혔다. 90만 인파는 광화문광장에 2002년 50만 명이 월드컵 응원을 위해 모인 이후 가장 많은 숫자다. 그럼에도 쓰레기는 전무했다. 질서 유지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행사에 참석한 시민과 신자들은 자신의 쓰레기를 직접 치웠다. 방한위는 “30도를 오가는 더운 날씨에 21명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큰 사고는 없었다”며 “1984년 5월 6일 당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여의도 광장에서 순교자 103위의 시성식 미사를 했을 때처럼 이번에도 수준 높은 질서 의식을 보였다”고 밝혔다.

 앞서 시복식은 오전 8시20분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의 연주(‘새들에게 설교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로 시작됐다. 9시13분쯤 프란치스코 교황이 흰색 무개차를 타고 시청 광장에 들어섰고 사람들은 “비바 파파(만세 교황님)”를 외쳤다. 교황은 자주 멈춰 서며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머리에 손을 올려 축복하거나 이마에 키스했다.

이상화·안효성 기자, 윤소라(숙명여대 영어영문)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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