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1)제72화 비관격의 떠돌이 인생-김소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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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운명론자>
나를 데려와 달라고 어머니가「아라사」에서 보낸 사람- 장작 수만리 길을 일부러 보냈으면 좀 이상하다. 고국에 다니러 오는 인편이 때마침 있었던 것이 아닐까
20년 전에 쓴 『운명논자』란 내 글에는 그때 일이 이렇게 적혀있다.
『내일이 운동회라는 날, 나는 길러주신 고모님 몰래 혼자 집을 떠났다. 어머니가 아들을 찾으려 사람을 김해까지 보내왔다. 그 분이 외조모님과 같이 고모님 댁에 당도한 날이 바로 운동회 날이다.
나는 그 전날 집을 나가 행방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진남포를 종점으로 한달 후에 나는 하릴없이 되들아 왔다. 진남포에서는 거기 호족인 김엽씨 댁의 식객이었다.「아라사」로 가는 편의를 얻기 위해 그분을 소개해 준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8세에 2천리 타향의 식객이란 나 자신으로는 그지없이 방정맞은 경력이지만, 3천명을 거느린 맹상군의 행사에도 아마 이런 애송이 식객은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보낸 사람이 하루만 일찍 김해로 왔거나, 내가 집을 나간 것이 하루만 늦었더라도 도리없이 나는 소년기의 한 시기를「아라사」에서 보냈을 것이다.
일본말의 능수라는 김소운 대신 하마터면 노어의 대가(?)하나가 생길 뻔했다. 가가 일소할 운명의 순간이 아니겠는가-.』 내가 13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아라사」혁명으로 어머니는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만일에 내가「아라사」로 갔었던들 어머니는 귀국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머니가「시베리아」철도로「블라디보스토크」까지 와서 거기서 선편으로 부산까지 돌아왔을 때. 내가 어려서 쓰던 밥 주발 하나를 짐 속에 넣어 왔더란 얘기를 후일 어머니의 친구 한 분이 내게 들려주었다.
어린 시절의 내 기억을 통 틀어서 이 밥 주발이 어머니의 사람을 내게 확인시켜 주는 오직 하나의 자료가 되었다. 마치 모르기는 하나, 엇갈린 단 하루의 오차가 아니었다면 나뿐만이 아니라 그 뒤의 어머니의 인생행로까지도 바꾸어 놓았을지 모를 일이다.
진남포에서 20여 일을 기다린 후에야 돌아온 김엽씨를 만나기는 했지만 만난 순간에「아라사」로 가겠다던 내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끝도 한도 없는「아라사」천지의 어디에 어머니가 살고 있는지 알 길이 망연한데다 김씨가 내왕한다는「아라사」는 겨우 연주대의 극동지방이었다. 그 연해주만 해도 한반도 하나만큼이나 넓은 지역이기는 하지만-.
진남포에서 김씨를 기다리는 동안, 해질녁이면 들판으로 나가 사람없는 곳에서 실컷 울기도 했지만, 결국은 도로아미타불로 다시 부산으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백모 70년』 이란 묵은 글 속에 돌아올 때 겪은 입맛 쓴 희극 한 토막이 쓰여져 있다.
「세계명작동화」로 널리 알려진『집 없는 아이』의 주인공「레미」소년을 두고 쓴 글의 뒷부분이다.
-「레미」소년의 나이 또래인 여덟살 때, 나는 혼자 진남포까지 2천리 길을 갔다가 20여일 후에 부산으로 되들아 오는 길이었다.
평양에서 기차를 바꿔 타려면 두어시간 여유가 있다. 역 대합실「벤치」에 앉아 나는 역에서 파는 도시락을 사 먹었다. 아침인지, 점심인지는 기억에 없다.
내 앞에 앉았던 30세쯤 되는 사내가 내가 먹고 버린 도시락을 주워서 거기 붙은 밥 낟알을 입으로 떼어먹는 것을 보고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 사내가 몹시 측은하게 여겨졌다.
「얼마나 배가고프면 저릴까-.」나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도시락을 또 하나 사서 그 사내에게 주었다.「이거 미안 하구만I.」사내는 그러면서 내가 준 도시락을 입을 다시면서 단숨에 먹어 치웠다. 그리고는 사내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어디까지 가디?」「몇시 차지?」.
내 대답을 듣고 나서 사내는「아직 두 시간이나 있으니 한숨 자라」며 제 옆자리에 나를 뉘었다. 차시간이 되면 깨워준다는 말에 나는 안심하고「벤치」에서 잠이 들었다. 차시간 전에 잠은 절로 깨었지만, 깨어보니 사내는 없었고, 내 주머니에서 돈지갑도 없어졌다. 덕분으로 나는 평양에서 부산까지 꼬박 일 주야를 물만 마시면서 굶고 와야 했다.
인간에 대한 무조건의 선의-그것이 어린 시절부터 내 가슴에 지닌 인생통행증이었다. 그리고 그 선의의 통행증에는 언제나 원가를 윗도는 비애라는 부가가치세가 뒤따랐다. 착하다고 믿은 일에는 어김없이 따라 오는 이 어처구니없는「리베이트」(반대 급부!) .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속담대로 나는 이 바보스런 인생 통행증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백모 3년」이라지만 내 경우는「백모 70년」이다.
내가 김해 아닌 부산으로 돌아왔을 때「아라사」에서 온 사람은 이미「아라사」로 되돌아가고 없었다. 단 하루 사이에 운명이 엇갈리다니 현세의 인연이 어지간히나 엶은 모자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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