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고대사] “김유신은 가야의 우두머리이자 신라의 영웅”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88호 28면

김유신 장군묘. 『삼국유사』 김유신 조에는 유신공의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 북쪽, 동으로 뻗은 봉우리에 있다고 나온다. 현재 김유신 장군 묘에 대한 진위논쟁이 있다. [중앙포토]

김유신(595~673)의 삶에 대해 역사적인 평가는 어떠할까. 고려시대의 평이 있다. 『삼국사기』 43, 김유신(하) 열전에 “신라에서 유신을 대우한 것을 보면 친근하여 서로 막힘이 없었으며, 나라 일을 위임하여 의심하지 않았으며, 그의 계획은 시행되었고 그의 말을 들어주어, 그의 말이 쓰이지 않음을 원망하지 않게 했으니 임금과 신하가 잘 만났다고 할 수 있겠다. 때문에 유신은 그의 뜻대로 일을 행하여 상국(당나라)과 계책을 같이 하여 삼토(三土·삼국의 땅)를 통합해 한 집안을 만들고 공명으로써 한평생을 마칠 수 있었다”라고 나온다. 한국 역사상 지금까지 이 같은 평을 들을 수 있는 신하가 유신 말고 또 누가 있을까? 현대 한국사에서 이런 인물을 한 명이라도 배출해야 하지 않을까?

<18> 삼한 통일의 씨앗

그럼 신라 사람들은 김유신을 어떻게 평했을까? 신라인 김대문은 유신에 대해 “가야지종(加耶之宗·가야의 우두머리)이고 신국지웅(神國之雄·신라의 영웅)이다. 삼한을 통합해 우리 동방을 바로 잡으니 혁혁한 공 세워 이름 남기니 해와 달과 더불어 견준다”고 평가했다. 『화랑세기』 15세 유신 공조에 나오는 구절이다. 유신의 삼한통합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기에 가야의 우두머리와 신국의 영웅에 대해 살펴보자.

금관가야 마지막 왕이 증조부
유신의 증조할아버지가 금관가야(또는 금관국,가락국,본가야)의 마지막 왕 구충(구해,구형)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화랑세기』 15세 유신공 조에서 새롭고 흥미로운 사실이 나온다<표 참조>. 6대 좌지왕(407~421), 7대 취희왕(421~451), 9대 겸지왕(492~521), 10대 구충왕(구해, 구형, 521~532) 등 5대에 걸쳐 신라 여자를 왕비를 맞았다는 사실이다. 신라는 금관국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가야에 대해 정치적 간섭을 했고, 금관국은 점차 신라에 부용국으로 변해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법흥왕 19년(532) 금관국주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 노종·무덕·무력(武力)과 더불어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므로, 왕이 예로써 그들을 대우해 상등(上等)의 위를 주었고 본국을 식읍으로 삼도록 했다. 이 때 무력의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고 나온다. 구해와 그의 아들들은 모두 진골 신분으로 대우 받았다. 무력은 진흥왕과 사도왕후(대원신통)의 딸 아양공주(대원신통)를 아내로 맞아 서현(대원신통)을 낳았다. 서현은 만명과 야합하여 임신을 했는데, 만명의 어머니인 만호태후(지소태후의 딸로 진골 정통)는 서현의 어머니 아양공주 가문이 진골정통이 아닌 대원신통류였기에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서현과 만명은 만노군으로 도망하여 유신을 낳았다.

김유신 장군 초상. [사진 권태균]

화랑도 활동하며 영웅의 길 준비
유신이 자라자 태양과 같은 위용이 있었다. 만호태후가 유신을 보고 싶어 하여 돌아올 것을 허락했고 직접 만나보고는 “이는 참으로 나의 손자다”라고 했다.(『화랑세기』 15세 유신공 조)

이로써 유신은 진골정통인 만호태후의 사랑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가야파들로부터도 추앙을 받게 됐다.

유신은 나이 열다섯에 14세 풍월주 호림공의 부제가 됐고(609년), 18살에 15세 풍월주가 되었으며(612년), 22살에 상선(上仙, 풍월주를 지낸 후에 오르는 자리)이 됐다(616년). 유신은 화랑도 활동을 통해 영웅의 길을 걸을 준비를 했다. 화랑이 되었을 때 가야파들은 유신을 받들기 시작했다. 가야파는 8세 풍월주 문노(기오공의 딸 지도왕후와 종형제)를 모시던 화랑도들로부터 시작된 무리들이다. 『화랑세기』 8세 풍월주 문노 조에 따르면 이들이 문노의 화상을 모셨던 사실이 나오고, 유신이 삼한을 통합하고 난 뒤 문노를 사기(士氣)의 종주(宗主·맹주)로 삼아 각간으로 추증하고, 신궁의 선단에서 대제를 행했다는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유신은 가야파라는 프리미엄을 갖고 화랑도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유신이 부제가 되었을 때 커다란 도량을 가지고 있어 낭도들을 능히 다스렸다고 한다. 그 때 가야파의 낭도 한 사람이 유신에게 “가야의 정통아니냐. 자기를 사적으로 도와달라”고 했다. 유신이 “나는 만호태후의 손자인데 네가 무슨 말을 하느냐. 또한 대인은 사애(私愛)를 하지 않는다”고 하며 공을 세워 승진하라고 했다. 후에 그 낭도는 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 같은 자세로 유신은 능히 각 화랑도를 화합했다고 한다.(『화랑세기』 15세 유신공 조)

유신은 가야 정통이지만, 그의 어머니 만명은 진골정통이었다. 그런가 하면 유신의 아버지 서현은 진골정통의 라이벌인 대원신통류 아양공주의 아들로 대원신통에 속했다. 따라서 유신은 화랑도의 3대 파벌인 삼파(三派, 진골정통·대원신통·가야파) 모두와 맥이 닿은 후손이었던 것이다. 유신은 늘 화랑도들에게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게 되면 나라에 외우(外憂, 외국 적의 침입)가 없어질 것이니, 가히 부귀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고 했다고 한다. 유신의 신변에는 늘 신병(神兵)들이 있어 좌우에서 호위하였다고 한다.(『화랑세기』 15세 유신공 조)

언제부터인가 유신에 대한 신비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고구려와 전투서 공 세운 뒤 엘리트 부상
612년 유신이 풍월주의 지위에 올랐을 때 날마다 낭도들과 더불어 병장기를 만들고 궁마를 단련했다. 이에 춘추의 작은 아버지 용춘공이 유신을 사신(私臣)으로 발탁했다. 그 때 용수공 또한 그 아들 춘추공을 유신에게 맡겼다. 유신은 크게 기뻐하며 “우리 용수공의 아들은 삼한의 주인이다”고 말했다. 18세가 된 유신은 춘추공에게 말하기를 “바야흐로 지금은 비록 왕자나 전군이라 하더라도 낭도가 없으면 위엄을 세울 수가 없다”고 했다. 춘추공은 이에 유신의 부제가 되었고, 나중에 유신의 누이인 문희를 아내로 맞았다.(『화랑세기』 15세 유신공 조) 609년 이후 화랑·풍월주·상선을 거치며 유신은 스스로 중심이 되어 춘추를 왕으로 세우기 위한 결사인 칠성우를 만들고 이끌었다.

진평왕 51년(629) 8월 대장군 용춘과 서현 그리고 부장군 유신을 보내어 고구려 낭비성을 침범했는데, 고구려 군대에 맞선 신라 군사들이 두려워하여 싸울 마음이 없었다. 유신은 말했다. “내 듣건대 옷깃을 정돈해야 옷이 바로 되고 벼리를 쳐들어야 그물이 펴진다고 했는데 내가 바로 그 벼리와 옷깃이구나!” 이에 말을 타고 칼을 뽑아 들고 적진으로 향해 바로 나아가서 세 번 들어갔다가 세 번 돌아왔는데 들어갈 때마다 혹은 장수의 목을 베어오고 혹은 깃발을 빼앗아왔다. 여러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타서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면서 나아가 쳐서 5천여 급을 목 베어 죽이니, 그 성이 그제야 항복했다. (『삼국사기』4, 신라본기 4, 진평왕 51년조)
이 전쟁을 통해 유신은 군사적 엘리트로 데뷔했다.

고려시대에도 업적 칭송 받아
유신이 춘추를 그의 부제로 삼은 612년 이후 햇수로 43년이 되는 654년 3월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42, 김유신(중) 열전에는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대를 이을 계승자가 없어 유신이 재상인 이찬 알천과 의논해 이찬 춘추를 왕위에 올리니 그가 태종무열대왕이었다고 한다. 춘추의 왕위 계승에는 유신이 만든 칠성우가 큰 역할을 했고, 그 중심에 유신이 있었다. 이로써 유신의 춘추 왕 만들기 43년 프로젝트는 마침내 성공하게 된 것이다.

660년 정월 상대등으로 임명되었던 유신은 백제를 침공할 대장군으로 태자 법민을 모시고 5만 병력을 거느리고 13만 당나라 군대를 응원하여 백제를 정복하였다.(『삼국사기』5, 태종무열왕 7년)

668년 6월 21일 문무왕은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대총관에 임명하여 고구려를 정복하는 총사령관으로 삼았다. 그 때 왕은 풍병을 알았던 유신을 서울에 머물게 했다. 결국 신라군은 유신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고 삼한통합을 이뤄냈다.

『삼국유사』 태종춘추공 조에 보면 신문왕(681~692) 때 당 고종(650~683)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무열왕(시호)의 묘호를 당태종과 같은 태종(太宗)이라 한 것은 문제 삼았다. 신문왕은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지만 거룩한 신하 김유신을 얻어서 삼국을 통일했으므로 태종이라 한 것”이라고 했다. 당 황제는 그 글을 보고 그가 태자로 있었을 때 하늘에서 “삼십삼천의 한 사람이 신라에 태어나서 김유신이 되었다”고 해서 책에 기록해 둔 것이 생각나서 이를 꺼내보고는 크게 놀랐다고 한다. 이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 태종의 칭호를 고치지 말도록 했다. 죽은 유신이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신라를 구한 것이다.

『삼국사기』 43, 김유신(하) 열전에 따르면 42대 흥덕대왕이 유신을 봉하여 흥무대왕이라 했다고 나온다. 『삼국유사』 김유신 조에는 54대 경명왕 때 유신을 추봉하여 흥무대왕이라 한 것으로 나온다. 신라사람들은 유신을 대왕으로 추봉해 기억했던 것이다.

역사는 그를 기억한다. 고려시대에는 “향인들이 유신을 칭송하여 지금까지 잊지 않는다. 사대부들이 그를 알고 있는 것은 그럴 수 있겠지만, 꼴 베는 아이와 소 먹이는 아이들까지도 또한 그를 알고 있으니, 그 사람 된 품이 반드시 보통사람보다 다른 점이 있었다고 했다”고 나온다. (『삼국사기』43, 열전 3, 김유신 하)

대한민국에서도 1977년 경주에 통일전을 세워 태종무열대왕·문무대왕·김유신(흥무대왕)의 영정을 모셔 삼한통합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교수·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