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6)제72화 비관격의 떠돌이-김소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지난 세말에 나는 한달동안의 동경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동경에서는 어느 친구 내외가 잠시 미국으로 떠난 뒤 텅빈「맨션」을 숙소로 쓰게 됐는데 우연히도 거기가「우에노」공원 뒤라 조석으로「시노바즈이께」옆을 지나치면서 60년 전의 감회에 잠기기도 했다. 시대의 변천으로 그 많았던 요정이며「마찌아이」들이 거의 딴 직업으로 전환을 했지만 낯익은 옥호며 옛날 가게들이 아직도 그 시절 그대로 몇 집은 남아 있었다.
세상에는 혁혁한 공훈을 세운 사람도 많고, 후세의 귀감이 될만한 덕망 높은 분들도 많건만 내게는 남겨야 할 화제다운 화재란 아무 것도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에서 열까지가 모두 비규격이요, 불규칙동사 뿐인 인생-, 그런 내게 이런 글을 쓰라니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내가 남에게 남길 수 있는 이야기란 무엇일까-.
이런 말을 무슨 겉치레나 겸손으로 듣는 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과거를 돌아볼 만한 변변한 사진 한 장이 없다.
얽히고 설킨 일본과의 민족 감정-. 그 틈바구니에서 부평초처럼 떠돌이로 살아오면서도 가슴속에 조국 하나를 지녔다는 것이 대 밑천이요, 보람의 전부였다.
그것을 어떻게 남에게 내보이겠는가.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만 앓아온 신앙을 어떻게 남에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내 학력에는 가끔「가이세이(개성)중학 중퇴」라고 쓰일 때가 있으나 기실은「중등학교」라고 구별해서 부르는 야간부였다. 열 넷에서 3년 동안 이「가이세이」중등학교에 적을 두기는 했지만, 내가 다닌 것은 고작 1년쯤이나 됐을까. 근로 소년을 상대로 하는 이 중등학교는 결석에 대해서도 매우 관대했다. 직업이 바뀔 때마다, 거처가 달라질 때마다, 학교를 한동안씩 쉬는 것은 소학교 때부터 내 몸에 밴 습성이다.
그 대신 낮에는 틈만 나면 도서관에를 간다. 학교 공부와는 차원이 다론 또 하나의 세계가 거기 있다.「푸시킨」「톨스토이」「투르게네프」「체흡」「휘트먼」「카핀터」「키트」「하이네」「바이런」「베를렌」「스코트」「테니슨」「하우프트만」-.
명치중기 이후의 일본의 작가 시인군-, 「이와느·호오메이」(암야포명)「기따무라·도오꼬꾸」(북촌투곡) 「구니끼따·도꾸보」(국목전독보)「시마자끼·도오손」(도기등촌)「기따하라·하꾸슈」(북원백추)「센께·모또마로」(간가원휘)들의 이름을 알고, 그들의 작품을 처음 대한 것도 이시기다.
학력을 묻는 이에게 일쑤『도서관 대학이지요』하고 대답하는 것은 비단 우스개만은 아니다(정작「도서관대학」이란 것이 따로 있기는 하나 그것은 내가 말하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그러나 아직 이때는 도서관 대학의 예과 시대다.「우에노」도서관, 「히비야」도서관엘 부지런히 다니기는 했지만, 내가 의식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에 힘을 들인 것은 그 뒤 동경·대판, 그리고 서울에서 지낸 몇해 동안이다.
「도서관 대학」은 이 예과시대를 거쳐 서울에서「매일신보」학예부 기자 노릇을 한 1930년까지 단속적으로 5, 6년 계속되었다. 관동 대 진재로 해서「가이세이」중등학교를 졸업 못한 채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간 후 틈틈이 사립대학을 두서넛 들여다보기도 했지만, 물론 어느 대학 명부에도 내 이름은 없다. 어느 때는 청강생으로, 또 어느 때는 월사금(등록금)1원도 내지 않은 유령 학생으로-.
월사금 없이 1년쯤은 강의실에 드나들어도 아무도 탈 잡는 사람이 없는 그런 시절이었다.
진재가 일어나던 그해 봄,「닛뽀리」(일모리) 두부 집 2층에 방 하나를 빌었다. 입구 대학 영문과에 다니는 「요시까와·이찌로」(길천일낭) 라는 친구와 같은 방을 쓰는데 그도 밤이면 역시 인력거를 끄는 고학생이다 (그는 졸업 후「대판매일」에 들어가「대매」의 기상대 주임·도서실장을 거쳐 정년으로 퇴사하기까지 40여년을 한 신문사에서 배겨냈다).
「요시와라」(길원=유곽지대)까지 취객을 싣고 가면 50전-.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바나나」를 사 가지고 뫄서는 먼저 잠든 내 입에 껍질을 벗긴 그 「바나나」를 쑤셔 넣는다. 역시 신문에 투서한 글이 인연이 되어서 그가「쓰즈끼」(도축)라는 남작 집에 서생으로 가게된 뒤에도 나는 두부 집 2층 방에 그냥 남았다.
두부 집에서는 두부를 만들고 난 순물을 병에 넣어「소오뿌」라는 이름으로 팔았다. 가느다란 작은 병 하나에 2전-. 식빵에 「잼」을 바른 것 세 쪽에다 이「소오뿌」한 병이 내 호화로운 조찬이다. 점심·저녁은「소오뿌」없이 식빵 세 쪽만-. 빵은 열흘치를 한꺼번에 사둔다. 돈으로 가지고 있으면 없어지기 때문인데,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가 되면 빵은 굳어서 나무토막 같이 되어 버린다.
돈을 빵집에 미리 맡겨두고 하루하루씩 새 빵을 먹을 방도도 있었으련만 내 소견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도록 미련했다. 생활기술의 결여- 일생을 두고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이 반갑지 않은 길동무는 벌써 그 때부터 내 속에 만만찮게 자리를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