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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죽은 시인의 사회' 를 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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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
이규연 기자 중앙일보 탐사기획국장
이규연
논설위원

“우리는 학생의 75%를 명문대에 보냈습니다. 이곳은 최고의 진학률을 자랑하는 학교입니다.”

  교장은 입학식에서 학생들을 향해 핵심가치를 외친다. “전통·명예·규율….”

 엘리트 사립고에서 <학생 1>은 모범생이다. 가난한 가정 출신인 <1>은 A학점을 유지하고 인기도 좋다. 하지만 ‘유쾌한 범생이’ 가면 밑에는 심적 갈등이 도사리고 있다. “하버드의대를 가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토도 못 달지만 내심은 연극인을 꿈꾼다. 다른 학생들도 <1>과 비슷하게 가면을 쓰고 생활한다.

 권위와 점수로 채워진 학교에 젊은 영어교사가 부임해 온다. 그는 자신을 “오, 캡틴, 나의 캡틴”이라고 부르라고 한다. “카르페 디엠 (라틴어 : 지금을 소중하게 즐겨라)” “인생을 독특하게 살라”고 가르친다. 이에 용기를 얻은 <학생 1>은 친구들을 모아 ‘죽은 시인의 사회’를 결성한다. 숲 속 동굴에 모여 시를 읊조리고 가벼운 일탈을 즐긴다. 연극단에도 들어가 주역을 따낸다. 드디어 무대에 오른 <1>은 훌륭한 연기를 선보여 갈채를 한 몸에 받는다. 하지만 아버지는 연극을 포기하라고 강요한다. 결국 <1>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만다.

 1989년 개봉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다시 봤다. 25년 전에는 답답한 교육현실 측면에서 봤다면 이번에는 억압프레임에서 뜯어봤다. 영어교사인 키딩(로빈 윌리엄스 분)은 성적에 찌든 학생들에게 긍정·행복 메시지를 전파하려 애쓰지만 <학생 1>의 비극을 막지는 못한다. 영화가 실제였다면 키딩과 주변인은 <1>이 만성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을까. 미국 정신의학회의 우울증 체크리스트와 대조하며 영화를 천천히 돌려봤다. 9개 진단요소 중 5개 이상의 증상이 지속적으로 나타나야 우울증이다. <1>은 단 두 장면에서 희미한 증상을 보여줄 뿐이었다. <표 참조>

 현실 세계에서도 대개 우울증 환자는 두터운 가면을 쓰고 있다. 로빈 윌리엄스가 그랬다. 유쾌의 대명사인 그가 실은 만성우울증 환자였다는 사실은 전 세계 팬을 경악하게 한다. 키딩이 <학생 1>이었다니, 지독한 역설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바로 우울이 억압당하는 사회였던 것이다.

 로빈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날, 삼성서울병원 전홍진 교수팀이 미국 하버드의대 교수팀과 함께 한 연구결과를 발표한다. 같은 수준의 우울증을 앓고 있으면서도, 한국인이 우울한 기분을 말·표정으로 표현하는 정도가 미국인보다 휠씬 낮았다는 내용이다. 우울의 감정을 억누르고 속으로 삭이다 극단적 선택으로 치닫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한국은 지구촌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자살 고위험국’이다. 경제협력기구 회원국 중 10년 넘게 불명예 1위를 유지하고 있다. 기존의 사회변동 이론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독특한 뭔가가 우리 사회에 꿈틀거리며 난장을 치고 다닌다. 국내 정신의학계는 최근에야 그 괴물의 정체를 탐사하기 시작했다. 전 교수팀은 괴물의 한 모습을 포착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드디어 밝혀진 괴물의 일면은 ‘억압된 우울’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이고, 로빈 윌리엄스의 가면이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알게 된 것만으로도 무수한 생명을 앗아간 ‘한국형 괴수’와 맞설 작은 발판은 마련됐다.

 키딩 선생의 가르침은 미국보다 우리에게 쓸모가 있다. 오늘도 여전히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지인들에게 인사말을 날려 보자.

 “카르페 디엠.”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