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4> 제71화 경기 80년 (42) <제자=필자> 서장석|동란 중의 학생 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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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51년3월 임시 수도 부산에서 다시 출발한 경기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학교 운영에 있어 차차 정상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비록 천막 교사였지만 교사들은 학생 지도에 배전의 열과 성을 다했고, 학생들 또한 이의 뒤를 따라 더욱 진지한 태도로 공부에 열중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한가지 아쉬웠던 것은 여려가지 현실적 제약 때문에 학생들에게 과외활동을 충분히 지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체력 단련을 위한 운동장이라야 겨우 손바닥만한 크기의 마당에 철봉 몇개가 고작이었고, 그밖의 특별 활동을 위한 시설도 준비된 것이라곤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학생들은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 갖가지 과외 활동에 열심히 참가했다. 체육 분야에 있어서 특히 배구만은 52년도의 각종 대회에 참가해 두 차례나 우승을 차지, 일제시대 때부터 내려온 「경 기배구」의 전통을 이었다.
52년도에는 배구 이외에도 수영·송구·야구·육상·체조 등이 재건돼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해 10월에 있은 제33회 전국 체육 대회에 출전해서 배구가 우승, 야구는 준우승, 그리고 남중 체조부문에서 이기춘 (53회) 이 1위를 차지하는 좋은 성적을 올렸다.
53년 휴전 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경기는 서울로 복귀, 학교의 기능이 정상을 되찾게 됨으로써 체육 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배구·야구·송구·체조·육상 이외에 탁구·농구·정구 등이 부활돼 학도 체육 대회와 전국 체육 대회 등 각종 대회에 참가. 훌륭한 성적을 올렸다.
비단 체육 활동 뿐 아니라 학생들의 문예·출판 활동도 크게 활기를 띠었다. 피난시절 중 부산·서울 분교에서 모두 7개의 한·영자 지·지가 나오는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중 중요한 것을 꼽아보면, 교지 「망양」은 51년10월 부산 대신동 가교사에서 개교 51주년 기념으로 발간된 것인데, 피난살이의 혼란 속에서도 「경기 문학」의 굳은 의지를 잇는 주옥같은 글들이 많이 실렸고, 학생들은 이를 통해 전쟁으로 황폐된 정서를 다듬을 수 있었다.
「경기 주보」는 「망양」에 이어 52년6월에 발간된 주간 신문으로 체재는 「타블로이드」 2면에 동시 인쇄, 내용은 주로 문예물을 많이 게재했는데, 6호까지 같은 제호로 나오다가 7호부터는 「주간 경기」로 바뀌었다.
이처럼 부산 분교에서의 문예·출판활 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음에 자극돼 서울 분교의 학생들도 52년11월 신문 형태의 교지「백선」을 발간했고, 이어 53년7월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중·고 영자 신문 『경기·타임즈』를 창간했으나 연간을 보지 못했고, 환도 후 부산분교가 복귀하면서「경기·뉴스」로 제호를 바꿔 그 뒤를 이었다.
체육·문예 활동 이외에 특이한 것으로 웅변·영어 웅변·토론 등의 대내외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52년9월 전국웅변대회에 경기 웅변반이 서울대표로 참가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미국의「헤럴드·트리분」지가 주최하는 세계 고교생 토론 대회에 김청현 (49회) 이 한국 대표로 선발돼 참가하는 성과를 올렸다.
또 그해 12월에는 이화여대강당을 빌어 교내 영어 웅변 대회를 처음 개최했다. 이는 학생들의 영어 학습 의욕을 고취하기 위한 것으로, 당시 고 2였던 김진태 (50회)가 우승을 차지했다. 김진태는 다음해인 53년 11월 김청현에 이어 두 번째로 세계 고교생 토론대회에도 참석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 밖의 학생 특별활동도 대단한 의욕으로 재 출범했다. 45년10월 경기취주악단으로 발족, 50년초엔 서울 시공관에서「베토벤」의 교향곡 5번『운명』을 연주하기까지 했던 42인조의 경기「밴드」부는 전란 중 악기를 모두 잃어버려 기능상실의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53년 봄부터 활기를 되찾아 그해 12월 전국음악경연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는 급성장을 보였다.
화학·물리반도 학교의 질서가 잡혀감에 따라 교내에 실험실을 갖추고 각종 과학실험에 몰두했다. 화학반은「벤젠」의 유도체합성·「아지노모또」합성·「사카린」합성·우물물속의 염소량측정 등의 실험을 해냈고, 물리반은 교내에「안테나」를 설치해 무선통신에 관한 여러 실험을 하고「주간물리」라는 과학잡지를 발간,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연극반은 전란 중 가장 먼저 활동을 개시, 51년 예술제에『가야금의 유래』라는. 작품을 공연해 호평을 받았고, 52년부터는 군 병원과 후방 군부대에서 위문공연을 갖는 한편, 종군 방송 학교대에서 연극 분야를 맡아 군 사기 진작에도 크게 기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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