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의 키신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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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그를 두고 「키신저」의 복사판이라고 말한다.
별명마저도 『키신저의 키신저』. 미국의 한 주간지가 붙인 이름이다.
「레이건」정부의 새 국무장관으로 임명된 「헤이그」장군의 면모는 이 한마디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구설수가 적지 않은 인물이다. 첫째 출세가 너무 빠른 탓이다. 대령에서 대장이 된 것은 주월군 대대장 시절인 1969년에서 1972년 사이. 그러니까 1년에 별 하나씩을 단 셈이다. 대장이 될 때는 그의 앞에 줄로 서있던 선?장성이 2백43명이나 되었다.
일설에는 「맥아더」원수의 오른팔이었던 「폭스」장군의 사위인 것이 그의 승진 「엘리베이터」가 되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미 육군 사상 전례 없는 일이라고 한다.
「군복외교관」이란 「타이틀」은 별로 반가운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학점을 보면「조지타운」대학의 수학시절이 있다. 전공은 『국제관계론』제대로 문무를 겸비한 노력가이다.
우리 나라와는 인연이 없지 않다. 한국 동란 중 미제10군단으로 복무했었다. 그때도 역시 참모역이었다.
1947년 「웨스트·포인트」졸업이래 야전경력은 월남전에서 대대장·여단장을 역임한 1년간이 전부이다.
정책 입안자로 「데뷔」한 것은 「존슨」대통령 초기에 「맥나마라」국방 장관의 부특보가 되면서였다. 이때부터 그는 「키신저」교수(당시 「하버드」대)의 저서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키신저」의 전략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모티브」였다. 행운의 「티킷」을 제대로 잡은 셈이다.
1969년 백악관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그는 권력의 핵심에서 더욱 각광을 받을 수 있었다. 「키신저」의 「콤비」라는 점에서 그는 「키신저」의 명성과 신화도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키신저」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그의 영향력도 함께 부풀어 갔다. 그는 「키신저」의 그림자인 국가안전 보장문제 담당 대통령 부보좌관으로 「닉슨」중공방문의 길잡이가 되었고, 월남 평화 회담 때도 실무의 주역이다.
「키신저」가 백악관 보좌관에서 국무장관으로 영전하면서 그는 자연히 그의 자리를 승계해, 명실공히 『「키신저」의 「키신저」』가 되었다.
요즘 다시금 구설수에 오른 것은 바로 「닉슨」대통령이 사임하기까지의 시말을 지켜본 제일의 측근자였던 점이다.
「닉슨」의 뒤를 이은 「포드」대통령시절엔 NATO 군사령관에 전출, 「유럽」의 본바닥에서 문무의 「레귤러·코스」를 밟았다. NATO 사령관직은 군무보다는 외교관의 자질을 더 필요로 하는 자리다.
「키신저」시대가 종막을 고한지 5년. 『「키신저」의 「키신저」』는 그 동안에 외교「스타일」이 어떻게 변모했는지 두고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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