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수와 정한을 담아 망국의 슬픔을 노래|미국에서 타계한 원로가수 백년설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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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주인이면서도 나그네였던 시절, 울고 싶어도 마음놓고 울수 조차 없었던 시절.
일제의 고통스러웠던 시절에 우리의 노래로써 나그네 신세의 설움과 울분을 달랬던 노래들.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고향설』 등이 모두 그때 불려졌던 노래들이다.
이 노래의 주인공, 백년설씨의 죽음은 평소 그의 노래를 즐겨듣던 「팬」들을 슬프게 했다.
지난 8일, 미국「로스앤젤레스」에서 향년 65세로 숨진 백씨의 장례식엔 그의 화려했던 추억을 잊지 못하는 재미동포「팬」들, 그리고 부인 심연옥씨(53)와 2남1녀의 자녀 등 50여명이 모여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지난 20여년간 국내에서부터 독실한 기독교(여호와의 증인)신자였던 백씨는 임종을 앞두고 장례를 조촐히 치러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하고 있다.
백씨는 78년 아들의 초청으로 미국 이민을 갔으며 공항에서 배웅하던 동료 연예인들에게 눈물을 지으며 이별의 슬픔을 보였다. 원로 작곡가 박시춘씨 등은 『떠나기 싫다면서 비행기예 오르더니-』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백년설씨(본명 이창민)는 한일합방 5년 뒤인 1915년 1월 19일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가출, 서울 한양부기학교에 입학은 got지만 학교공부는 제쳐놓고 문학과 연극에 더 흥미를 갖고 몰두했었다. 그래서 몇 편의 시와 각본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 한때 은행생활을 했으나 노래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22세 때 당대의 음악인 안기영씨에게 소질을 인정받아 「컬럼비아·레코드」사에 입사, 작사생활부터 시작했다.
23세 때 태평「레코드」사로 자리를 옮겨 『유랑극단』 『두견화 사랑』 『사랑의 지평선』등을 처음으로 취입, 가수로「데뷔」했다. 「디스크」가 나온 뒤 반응이 대단해 곧이어 『번지 없는 주막』『나그네 설움』 『고향설』『하모니카수첩』등이 연달아 「히트」, 그는 곧 일급 가수가 됐다.
이 인기로 남인수, 이난영, 장세정씨 등과 함께 북만주·중국대륙·일본·전국을 돌면서 나라 잃고 흩어진 백성들의 한을 노래로 달랬다.
45년 해방 뒤엔 「오리엔탈·레코드」사를 창설했고 휴전직후인 53년엔 가수협회를 만들어 초대회장이 되기도 했다. 63년 가요계를 은퇴, 사업에 손을 댔으나 실패했고 67년부터 70년까지 경향신문 일본지사장으로 활약했었다.
백씨는 6·25때 상처, 지금의 부인 심씨와는 55년 대구에서 OK「레코드」사에 전속해 있을 때 결혼했다. KPK악단에서 노래했던 심씨는 휴전직후 『아내의 노래』 『한강』등 「세미· 클래식」창법으로 인기 있던 가수였다.
75년 10월 우연히 병석에 누운 뒤 그동안 3차례에 걸쳐 입원치료를 했으나 완치되질 않았다.
백년설씨는 갔지만 그가 남긴 애수와 정한이 담긴 그의 노래들은 영원히 「팬」 들의 가슴에 남아 애창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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