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영남 제일관」74년만에 복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임신·정유의 두 난리를 겪고 난 뒤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축성했다가 일제가 헐어버린 대구성의 영남 제일관이 헐려진지 74년만에 복원됐다.
대구시가 지난해 11월 6억7천여만원을 들여 대구의 관문인 망우공원부지(동구 만촌동) 2천8백51평에 착공한 영남 제일관 복원공사가 12월초 완공을 앞두고 요즘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영남 제일관은 흔적을 잃은 대구성의 4대문 가운데 남문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중충문루(중층문루)에 팔작 지붕을 얹은 이조 후기의 건축양식을 되살리고 철근「콘크리트」로 현대적 감각을 가미한 높이 23m, 연건평 59.8평의 2층 구조.
또 높이 8m, 폭 9m, 길이 52m의 성벽은 옥 무늬가 있는 화강암분석으로 쌓아 옛 성의 운치를 느끼게 했다.
예로부터 사통팔달의 고장으로 군사·정치·경제의 요충이던 대구에 관문과 성곽이 쌓아진 것은 이조 영조12년(1736년).
그러나 이는 허술한 토성에 지나지 않아 당시 경상 감사이던 민응수가 상감에게 장계를 올려 『부산 동래에서 대구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침입로에 대비할만한 축성이 한군데도 없으니 만일 왜적이 쳐들어온다면 임진·정유왜란과 같이 온 나라가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진언한 것이 받아들여져 영남지방에서 최초의 석성이 쌓여지게된 것.
당시 축성된 대구성의 규모는 높이가 4m, 둘레가 2천6백여m로 4대문과 문루가 있었고 그중 가장 큰 남문을 영남 제일관으로 불렀고 동은 진동문, 서는 달서문, 북은 공북문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다.

<일제에 의해 헐려>
당시 성을 쌓는데 동원된 인원은 연7만8천6백명으로 착공 5개월만에 완공됐다는 것. 성벽에는 1백개의 비를 두어 각 비마다 비장1명씩을 배치하여 관찰사가 매일 이들의 근무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순찰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영남 제일관은 현 대구 중부경찰서에서 남쪽으로 뻗은 중구 종로와 남성로가 엇갈리는 네거리에, 진동문은 중구 동성로l가 동신 지하도 입구에 각각 자리잡고 있었다.
또 달서문은 중구 서문로1가52 조흥은행 대구 서지점 앞 네거리에, 공북문은 중구 대안동 57 중부보건소 앞에 세워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구성이 헐린 것은 한·일합방전 일인들의 횡포가 극에 달했던 이조 고종43년(1906년).
당시 친일파의 거두이자 대구 군수이던 박중양이 남문 안에서 한약·잡화상으로 치부한 일인들의 농간에 놀아나 상권확장을 위해 대구역에서 성내로 이이지는 도로를 넓힌다는 이유로 성역·성문을 모두 헐어버린 것.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 왜구의 후예들을 위해 헐린 역사의 「아이러니」를 지닌 대구성 복원은 대구시민들에게 또 다른 역사의 의미를 일깨워 줄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