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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0) 경기 80년-제71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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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30년대초의 제일고보는 개교 30주년을 넘기면서 명문학교로서의 위치를 더욱 굳건히 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 배움의 터전이랄 수 있는 교사만은 30여년의 연륜을 겪는 동안 너무도 낡고 초라한 것이 돼 있었다.
측 27년에 준공을 본 붉은 벽돌의 남관(본부건물)을 제외하고는 건물 모두가 목조였고 또 이미 그 수명을 다해, 빗물이 새고 층계가 삐걱거리는가 하면 채광도 제대로 되지 않아 대낮에도 어두컴컴해 언제나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
게다가 교사가 비좁기 짝이 없어 필요한 특별교실을 만들고싶어도 들어갈 장소가 없는 형편이어서 교사의 신·증축은 시급을 요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학교측은 기회 있을 때마다 관계기관에 이를 진정하고, 교사의 신·증축에 필요한 예산을 해마다 관리관청인 경기도청에 신청했으나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한편 운동장도 교지 전체면적에 비해 크게 비좁은 편이었다. 더구나 당시는 학생들 사이에 각종 운동경기가 매우 성행하고 있었으므로 그때까지의 좁은 운동장 시설로는 학생들의 왕성한 운동열을 도저히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때문에 운동장의 신축은 대단히 시급한 일이었다.
운동장 확장공사는 33년 8월 여름방학 기간중 학생과 교직원들이 힘을 합쳐 방학기간을 모두 이에 바치는 식으로 시작됐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자원노력봉사를 하면서까지 운동장을 넓혀보겠다는 학생들의 노력이 가상했던지 경기도에서 공사비로 약 5천원의 예산을 지원해줬으며, 학교는 이 돈으로 학교 뒤 언덕을 깎아냄으로써 34년말께에는 약 1천평의 운동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운동장 확장사업이 끝난 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정서를 길러줄 목적으로 학교 전체를 마치 하나의 정원과 같이 만들려는 환경미화작업에 착수했는데, 졸업생 및 신입생들로부터 기부를 받아 학교정문으로부터 남관(당시의 본관)에 이르는 경사지 일대에 정원수를 심고 돌을 배치했다.
또 북쪽 뒷산에도 나무를 심고 돌을 배치했으며 서남쪽엔 연못까지 만듦으로써 학교환경을 새롭게 바꿔놓았다. 특히 성덕원이라 불렸던 뒷동산은 경치가 매우 좋고 조용한 곳이어서 학생들은 점심시간이나 방과후면 이곳에 올라와 서로 담소를 나누거나 독서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나 환경미화작업이 이처럼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음에 비해 정작 가장 중요한 사업인 새 교사의 신축은 여전히 요원한 일로만 생각됐다.
하지만 학교측에서는 언젠가는 반드시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 준비작업으로 필요한 교지를 확보하기 위해 학교 서북쪽에 인접한 민유지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이 계획이 발표되자 학부형들은 후원회를 조직, 기부금 모금운동을 벌였는데 모두 8천원을 모아 경기도 당국에 기부했다. 이에 도 당국은 2만원을 추가 부담했고, 이로써 제일고보는 장차 교사를 신축할 때 필요한 부지를 모두 매수할 수 있었다.
이같이 교사 신축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던 중, 35년 드디어 당국으로부터 새 교사신축 결정이 내려졌다. 즉 경기도 학무과는 제일고교 신 교사 공사비로 모두 30만원을 책정했는데, 20만원은 일반 기부, 나머지 10만원은 도에서 부담키로 결정한 것이다.
그 뒤 1년 동안의 준비 끝에 이듬해인 36년 8월에는 대망의 신축공사가 착공됐으며 1년9개월만인 38년 3월 3층 본관과 2층 별관이 완공되기에 이르렀다.
그리나 교사는 새로 지어졌으나 새로 장만키로 한 학생용 책·걸상을 마련할 비용이 부족했다. 이는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공사비가 초과로 소요됐기 때문이었는데 다행히도 학부형과 유지들 그 중에서도 특히 당시 조선일보사장 방응모·실업가 방의석 양씨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새로 준공된 제일고보의 교사는 당시 장안의 큰 화제였는데, 3층 흰색의 본관 건물은 모양도 보기 좋았을 뿐 아니라 전관이「스팀」난방식으로 꾸며지는 등 당시의 교사로서는 최일급 수준이었다.
38년 4월 신학기를 맞아 전학년 학생들은 드디어 백악의 새 교사에서 새 학년이 되는 기쁨을 맛봤다. 그러나 공사를 서두르느라 건물의 내부 특히 복도나 교실바닥은 아직 거친 상태였는데, 학생들은 일과가 끝나면 새끼와 쌀겨가 든 주머니로 마루바닥을 1시간씩 닦고 하교하는 열성을 보였다.
이어서 이해 가을 대강당이 준공됐는데 조선일보의 방사장은 이번에도 「그랜드·피아노」1대를 기증하는 호의를 베풀었다. 다시 그 이듬해인 39년 11월에는 체육관과 그 부속실이 준공됐는데, 이로써 그때까지의 목조교사는 모두 없어졌고 따라서 제일고보는 그야말로 새 배움터로 탈바꿈, 그 면모를 일신하기에 이르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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