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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동네 집들 숟가락 수도 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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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부산에서 렌터카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 A(40)씨는 올해 초 대출을 받아 사업을 확장하려 했다. 하지만 은행 대출을 받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한 대당 3000만원 하는 렌터카를 100대 가량 갖고 있었지만 자동차를 담보로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A씨는 렌터카 대출상품을 내놓고 있던 경남 진주저축은행의 문을 두드려 대당 차량가액의 70%를 담보로 인정받고 2억원을 빌렸다. 이 저축은행 김재훈 경영본부장은 “장사능력, 주변 평판, 인격까지 고려해 대출을 해주는데 A씨는 평판이 좋아 대출이 가능했다”고 했다. 틈새시장을 노려 상품을 개발하고, 정성평가로 위험을 낮춘 이 저축은행의 렌터카대출(36개월 분할상환)의 부실률은 1%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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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이후 한국 금융은 저축은행 사태로 홍역을 치렀다. 금융소비자들은 잊을만 하면 들려오는 저축은행 영업정지 소식에 애써 모아둔 돈을 날리지 않을지 마음을 졸여야 했다. 이후 3년간 105개였던 저축은행 중 30개가 문을 닫았다. 현대스위스·솔로몬·토마토·제일 등 당시 상위 20위에 들던 업체 중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저축은행은 못믿을 곳’이란 인식이 널리 퍼지며 업계 전체가 위축됐다.

 하지만 모두 그랬던 것은 아니다. 혹독한 시절을 지난 뒤 살아남은 곳이 87곳. 그 가운데 18곳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6년 간 흑자를 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숟가락·운동화’로 대표되는 지역 밀착, 현장 중심의 관계형 금융 덕분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이들 18개 흑자 저축은행 가운데 12개사가 개인이 소유하는 자산 5000억원 이하의 중소형 저축은행이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하는 책임경영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한 곳을 제외하고는 대부업체를 끼고 영업을 하지 않는다. 한성저축은행(충북)은 “서민금융기관으로서의 비전에 부합하지 않는 여관·대부업 등에 대해서는 수익성과 관계없이 대출을 하지 않는다”고 표방한다.

 동네은행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다보니 지역 내 중소기업과 개인 대출 취급 비중이 전체 여신의 80%를 넘는다. 대표적인 관계형으로 분류되는 오성저축은행(경북)이 89.8%, 조흥(경남)이 89.5%, 국제(부산) 85.2%, 진주(경남) 82.1% 등이다. 저축은행 전체 평균(51.6%)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높다.

 그렇다보니 지역 밀착형 영업은 당연한 생존방법이다. 대표 뿐 아니라 직원들 대부분 지역 출신으로 동창회·종친회·계모임·로터리클럽 등에 참석하며 네트워크를 쌓는다. 52년 간 경남 통영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조흥저축은행의 직원들은 25년 이상 근속자들이 대부분이다. 오성저축은행 이우동 감사는 “영업사원들이 반경 500m 단위로 전담구역을 나누고, 일수 방식으로 매일 만나며 얼굴을 익힌다”고 했다.

 이렇게 쌓인 정보들은 대출심사를 할 때 반영이 된다. 진주저축은행은 연간 매출액, 재산상태 등을 평가한 후 사업성과 평판도, 지역 거주기간 등에 가산점을 부여해 대출 한도를 정한다. 조흥·한성 등도 담보가치가 부족하더라도 대표의 인간관계와 성품 등을 고려해 상환의지가 강하면 손실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한다. 조흥저축은행 김용진 전무는 “(담보에 대한) 외부 감정보다도 그 사람(차주)의 사업성과 자금 흐름을 봐서 탄력적으로 운영한다”며 “누구누구 이름만 대면 그 집의 흐름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결손이 크게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국제저축은행 유대병 대표는 “관계형은 소액으로 (잘 아는) 여러 명에게 대출해주는 방식이다보니 리스크가 낮다”고 말했다.

 수집한 정보들은 맞춤형·틈새상품 개발로 이어진다. 진주저축은행은 지역민 수요가 많은 건축자금·어린이집·렌터카 대출 등 10여 개의 상품을 개발해 운영하고 있다. 조흥저축은행은 취급 어종이 다른 어업종사들의 소득이 매달 균등하지 않은 점을 고려해 이자 납입이나 연체상황에서 이를 반영해주기도 한다. 오성저축은행은 등기가 나오지 않은 ‘체비지(환지방식 도시개발사업의 시행자가 사업비용에 충당하기 위해 지정한 토지)’를 담보로 해서도 대출을 해준다.

 또 무리한 규모 확대보다는 안정적인 성장을 추구한다. 흑자지속 저축은행 18곳의 올 3월 말 현재 자산·대출금·예수금 등의 변동폭은 6년 전인 2008년 6월 말과 비교하면 -5.8%~3.1%에 그친다.

 금감원 최건호 저축은행감독국장은 “관계형 금융을 통해 서민금융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면 저축은행도 꾸준한 이익을 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며 “중소형 저축은행은 지역밀착형 현장중심 영업활동에 중점을 두고, 1조원 이상의 대형 저축은행은 업종별·담보별 대출 포트폴리오를 분산해 리스크를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유미·심새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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