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97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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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일고보에 있어서 l927년은 「스트라이크」와 등교거부, 그리고 이에 따른 학생처벌로 점철된 수난의 한 해였다. 그런 속에서도 우리는 비교적 알찬 학창생활을 보냈다고 기억한다.
특히 27년에는 민족운동의 새로운 구심인 신간회가 결성돼 의식있는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우는 각종행사와 강연회를 많이 개최했다. 분주한 학교생활 속에서도 틈을 내어 종로의 YMCA회관에서 주로 열리던 진간회 주최 강연에 참석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나도 그 중의 하나로 YMCA를 자주 드나들었다. 여러 연사들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른 김도연씨와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서춘씨 등이다.
강연회가 열리는 강당에는 언제나 일본인 형사들이 입석해 연사의 발언내용을 하나하나 「체크」 했다.
그들은 강연내용이 지나치게 민족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때는 공개적으르 제지하고 나섬으로써 분위기가 매우 경색되곤 했다. 그렇지만, 연사와 청중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유대가 형성돼 강당안은 언제나 진지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당시 학생들의 생활이 면학일반도만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탈선(?)학생들도 있어서 주로 종로통에 몰려 있던 단성사·우미관, 그리고 조선극장(지금의 승동교회옆)등에 수시로 출입하면서 서양영화나 일본영화를 보거나 교복차림에 흡연을 예사로 하는 부류도 없지 않았다. 심한 경우에는 요릿집에까지 공공연히 출입하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별도로 학생들의 기율을 지도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고보학생쯤 되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책임진다는 식의 암묵적인 용인이 이뤄지고 있었던 때문이었으리라고 기억된다.
맹휴사건이 일단락지어진 28년 봄 새학년을 맞으면서 「시게다」교장이 퇴임하고 후임으로 함흥고보교장으로 있던「오오니와」씨가 부임했다. 「오오니와」교장은 원래 신체가 허약한 사람으로 교장부임 후에도 신병때문에 제대로 근무를 못했으며 급기야는 부임 1년반만에 재직 중 사망하는 불행을 맞은 사람이었다.
28년은 나로서는 특히 잊을수 없는 한 해였다. 4학년생들을 위한 금강산 수학여행에 대한 추억이 그것이다.
학생들 각자가 용돈을 절약해 근1년동안의 적금 끝에 이뤄진 이 여행은 그 해 10월5일부터 1주일간에 걸쳐 실시됐다. 우선 열거로 경성을 뗘나 고성에 도착, 그곳에서 배를 타고 외금강을 구경하고 안변의 석왕사까지 두루 돌아봤다.
나는 그때까지 장단에서 자라나 여행이래야 경성 또는 개성구경 정도가 고작이어서, 1주일동안의 금강산 탐승은 나에게는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이 때 구경한 금강산은 그후 두고두고 잊지 못하는 즐거운 추억거리가 됐고,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기만 하면 언제나 흐뭇한 마음에 젖어들곤 한다.
29년8월 「오오니와」교장 대신 새 교장으로 평양고보교장이던 「사이또」씨가 부임했다. 그는 한말 관립한성고교 시절 약6년간 평교원으로 재직한 일이 있어서 제일고보로서는 구면의 인사였다. 그가 부임 후 꼭 석달만인 11월3일 전라도광주에서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났다. 3·1운동이후 꼭 10년만에 일어난 이 사건은 우리나라 학생운동 중의 백미로 가장 순수한 학생들이 일으킨 민족운동이며, 그 규모 또한 전국적이었다는 데서 우리민족의 저항정신을 극명하게 드러낸 민족운동사의 쾌거였다.
일제는 이 사건에 대해 철저한 보도관제를 실시, 이 소식이 다른 지역으로 퍼지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그러나 30년1월 겨울방학에 지방에 내려갔던 학생들이 서울로 돌아와서 이 사건의 내용을 동료학생들에게 낱낱이 알렸다. 사건의 내막을 자세히 알게된 학생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제일고보 학생들은 개학일인 1월8일 아침부터 술렁했다. 수업 중 갑자기 비상소집종이 울림과 합께 교실마다『모두 운동장에 모이라』는 지시가 전달됨으로써 전교생이 운동장으로 몰려나왔다. 학생들은팜주학생사건의긴상믈 폭로하고, 첫째 종례교육을 철폐할 것, 둘째 조선역사를 가르칠 것, 그리고 조선어 교육시간을 늘려줄 것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이려 교문 밖으로 나가려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기마대가 학교주위를 완전포위하고 있어서 가두진출은 실패로 돌아갔다. 주동학생들이 경찰에 검거 구속됨으로써 많은 희생자를 냈다. 그러나 이날의 제일고보학생들의 궐기는 담시 서울에서 두번째의 학생궐기로 기록되는 쾌사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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