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마다 검은 연기…발구르던 그 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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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독자 박규열씨 제공>
KAL의「보잉」747사고기에 탔던, 박규열씨(29·회사원·서울시 노양진동 215의72)는 기체에서 탈출 직후 화염에 쌓인「점보」기의 생생한 모습을「컬러」사진으로 찍어 수기와 함께 중앙일보사에 보내왔다. 박씨는 미국서「컴퓨터」교육을 받고 귀국하던 길이었다. 박씨가 사용한「카메라」는「미놀타XGISE」,「렌즈」는 50mm 1·4짜리. <편집자주>
『비행기가 폭발한다』-.
고함과 비명의 수라장이었다. 잔디밭을 기다시피 달아나던 나는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발이 붙어버렸다.
안개와 연기, 그리고 불꽃에 휩싸인「점보」기의 처절하고 장엄하기까지 한 최후의 모습이 20m쯤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가방 속의「카메라」를 찾는 손이 떨렸다. 거리도 노출도 아랑곳없이 첫「셔터」를 눌렀다.
함께 탔던 신기원씨(38·한국비료 전산 과장)는 왼쪽 눈가가 피투성이가 된채 10m쯤 떨어진 곳에서『비행기가 폭발한다. 빨리 피하라』고 계속 고함을 질러 나를 부르고 있었다.
순간 재작년 KAL기의 소련「무르만스크」불시착 사고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때 일본의 어느 대학생이 찍었다는 호수 위의 KAL기 모습.
이때부터 신씨의 고함소리는 오히려 나를 침착하게 만들었다.『나도 저 광경을 찍어야만 한다』나는 일종의 사명감마저 느꼈다. 기체가 폭발하면 옆에 있는 배수로(깊이 lm쯤으로 기억된다)로 몸을 날리면 되겠지. 이렇게 마음먹자 여유도 생겼다.
거리를 무한대로 놓고 노출을 자동으로 조절했다.「타임」를 1백25분의l로, 5백분의1을 돌려가며「셔터」를 마구 눌렀다. 불길이 기체 뒷 부분에 있어 비행기 머리 부분이 안 찍힐까봐 10m쯤 뒤로 물러서기도 하고 위치도 이리저리 옮겼다. 나를 본 외국인 몇몇이 그제서야 「카메라」를 들이댔다.
멀리서「사이렌」소리와 함께 소방차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셔터」를 누른 뒤 손목이 뜨끔거려 내려다보니 1cm쯤 찢겨 피가 흐르고 있었다. 탈출 때 어디선가 다친 것이었지만 사진을 찍느라 아픔도 모른채였다.「카메라」에 남아있던 10장의「필름」은 금방 바닥이 났다. 신씨의 성화에 뒷걸음치듯 현장을 빠져나와 승객용「버스」를 탄 나는 그때까지도 마음이 들떠 있었다고『극적인 순간』을 내 손으로 잡았다는 흥분 때문이었다. 공항을 빠져나온 직후 나는 현상소로 달려갔다. 기내에서 찍지 말고「필름」을 많이 남겼으면 좋았을 것이란 후회도 했다.
이틀간 마음을 죄다 사진을 받아보니 8장 중 역시 처음 2장은 기체의 일부만 찍힌채 엉망이었다.
기내에서 찍은 사진을 보자「스튜어디스」였던「레베카·손」양이 생각났다. 바로 그녀가 찍어 준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내 좌석은 LA공항에 있는 친구가 배려를 해준 덕분에 맨 앞에서 2번째로 편안한 2인석이었다. 담당「스튜어디스」가 바로「홍콩」출신의「레베카·손」양과 김경희양이었다.
「앵커리지」에서 탑승한「레베카·손」양은 이국적인 외모에 특히 친절했다.
나는 가장 값비싼「코냑」을 한꺼번에 두잔씩 거푸 요구했으나 그녀는 조금도 불평없이 갖다줬다.
새벽2시쯤 내가 서울고교 후배인 이봉수군(26)과 술에 취해 떠들자 뒷좌석의 미국 여자가 「레베카·손」양을 불러 신경질을 냈다.
그러나「레베카·손」양은 우리에게 다가와 생긋 웃으며 한국말로『무얼 더 드시겠어요』하는 것이 아닌가.
부끄럽기도 하고 신기해서 나는 말을 걸었고 자연스레 친해졌다.
그녀는 내가 독사진을 찍어 달라고「카메라」를 내밀자 흔쾌히 응해줬다.「플래시」를 끼우고「셔터」를 누르는 그녀의 동작은 전문가처럼 능숙했다.
그러나 이 사진이 그녀가 남긴 마지막 기념품이 될 줄이야. 탈출의 혼돈 속에서 나는「레베카·손」양을 보지 못했다.
나는 밀려서 비상 구조대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래서 이렇게 살아 남았다.
3∼4명이 한꺼번에 미끄러져 서로 부딪쳤으나 아무도 제정신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레베카·손」양을 비롯한 용감한 승무원 덕이라고 생각할 때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살아남은 우리를 대신해 숨져 간 승무원들과 희생자 여러분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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