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여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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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젊은 시절의 여행은 교육의 일부다』「프란시스·베이컨」의 『맥상녹』에 나오는 말이다.
수학여행은 바로 그「살아있는 교육」에 뜻이 있다.
우리 일상생활의 테두리를 벗어나 새로운 체험을 쌓는 것은 적어도 젊은이들에겐 교육적일 수 있다. 서구 청소년들의「반테르프겔」운동도 말하자면 그런 착상에서 비롯되었다.
독일에선 벌써 1901년「카룰·피셔」라는 사람에 의해 이 운동이 장려 되었다. 글자그대로 철새(후조) 모양으로 여행을 하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관광「버스」나 비행기를 타고 한가하게 여행하기는 어렵다.「반데르포겔」운동은 도보 여행으로 일관한다.「특색」을 짊어지고 땀을 흘리며 열심히 걷는다. 바로 그런 것이 벌써 교육인 것이다.
물론 서울에는「유드·호스텔」과 같은 시설이 곳곳에 있어서「반데르프겔」을 반겨준다. 사회가 그만큼「수학여행」을 제도적으로 보강하고 있다.
요즘 어느 지방 실업여고생이 수학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자살을 하고 말았다. 즐거운 여행이 그 소녀에겐 비극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여행비용에 있었다. 그것을 감당할 형편이 되지 못했던 그 학생은 동료들의 추렴 (추렴)으로 수학여행을 떠났었다. 정작 그 추렴은 담임 교사의 양복 값에 쓰일 돈이었다고 한다.
이런 곡절들은 한마디로 우리의 교육현실·사회 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일부에 한정된 일이기를 기대하지만, 아뭏든 가난한 학생과 주접스러운 교사와의 심리적 갈등은 「교육」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얘기다.
우선 교사의 품위는 잠시 접어 두고라도, 수학여행의 문제는 교육당국의 심려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수학 여행이 여유있는 학생들에게만 주어지는 기회여서는 곤란하다. 수학여행이 교육의 연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일시의 비용 부담을 줄이는「아이디어」로 적금제와 같은 것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람직 하기로는「반데르포겔」과 같은 방식이 훨씬 절약적이고 교육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역시 우리 사회가 풀어주어야 할 과제다.
더구나 오늘과 같이 생활교육·일상윤리·정서교육이 요청되는 현실에서 그것은 결코 소홀할 수 없는 문제다.
수학여행이 벼르고 벼른 행사이거나 여흥에서 보다 큰 의미를 찾는다면 필경 그 부작용도
더 클 것이 틀림없다. 또한 그것이 한낱 학교 생활의 격식에 불과하다면 서울의 빈촌가 여인숙에서 새우잠이나 자는 수학여행으로 전락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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