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1화 경기 8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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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경성고보 교육의 뚜렷한 특징은 실업교육의 중시였다.
이는 총독부 당국이 내세운 『시세와 민도에 맞는 교육』의 구체적 표현이었다.
당국은 실업교육을 장려하기위해 1912년께 본교에 농업·상업의 실업과외에 수공과를 더 설치해 학생들에게 그중 하나를 의무적으로 선택하도록했다.
그때까지만해도 우리나라의 교육이 『문』에 치우쳐 실업교육에 등한했던 것이 사실이고,또 당시 실정으로 보아 이러한 실업교육이 절대로 필요했다. 그러나 실업교육장려의 이면에는 일본인 위정자의 정치적 목적이 결부되어 있었던데 문제점이 있었다.
이러한 실업교육이 대부분 양가의 자제들인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었을 것은 쉽게 짐작이 가는 일이다. 유교의 군자부기(군자는 한갓 그릇같은 존재가 아니다)의 사상 때문에 일인일기식의 실업교육에 대한 천시 관념을 쉽게 고칠수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이런 일화가 있다.
한말의 외부대신 박제순이 일본으로부터 선사받은 사과를 처음 맛보고 『그 사과 맛이 참좋은데』라고했다. 이말을 들은 하인이 『대감! 우리나라에서도 사과롤 재배할 수 있읍니다』고 했더니『어떻게?』하고 호기심을 보였다.
하인이 『학생들에게 재배법을 가르쳐주면 되지 않습니까?』고 하자 박제순은 『어찌 양반자식이 농사를 짓는단말인고!』하고 일갈해버렸다고 한다. 당시 양반층의 실업교육관을 잘 나타내고 있는 「에피소드」다.
이같은 풍조의 영향으로 경성고보 초기 실업교육은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삿뽀로」농학출신인 「오까」교장은 기회있을 때마다 장래에 있어 「근로」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이에따라 학생들도 점차 실업교욱에 흥미룰 느끼게되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데라우찌」총독 자신이 강조한 사항이었다. 「데라우찌」는 이학교에 부설된 교원양성소의 농업교육이 한국 농업발전의 근원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있었다. 그래서 그는 교원양성소를 시찰했을 때 실습지에서 잘 자라고 있는 보리를 보고 크게 기뻐했다.
당시 학생들은 각자의 희망에 따라 상료와 농두중 어느하나룰 택했다. 이 선택과정에서 서울등 도시출신은 농과를, 시골출신은 상과를 택하도록 학교측에서 조정했다.
상과학생들은 주로 학교판매부에서 실습을 했다. 또 민가의 장점을 빌어 물건을 팔고사고 계산을 하는 실습도 있었으며 방학때에는 시외, 심지어 개성부근까지 행상을 가기도 했다.
나는 농과를 택했다. 실습시간이면 농과생들은 괭이나 호미등 실습도구를 메고 재동국민학교 실습지나 경복궁 동쪽의 경사지에 마련된 실습지에서 밭을 일구고 파종을 했다.
한일합방이후 경복궁은 관리소홀로 거의 방치된 상태여서 조선 말기의 건축·공예·미술의 결정체로서의 우아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때문에 잡초만이 무성한 망국의 궁궐터에서 호미질을 하고있느라면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 경복궁의 실습지에는 과일나무가 아주 잘 자랐는데 특히 포도가 횰륭했다. 일본인「가와까미」(천상선병위)라는 사람이 와보고 한국에 이렇게 좋은 포도가 노지에서 나왔는가, 일본에서는 온실이 아니면 이런 것은 나오지 않는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또 「데라우찌」총독은 어느때 실습지에 말을타고 와서 제충국이 농장의 양쪽에 자라고있는 것을 보고 크게 칭찬하면서 이런것을 한국의 농가에 보급시키면 빈대를 전멸시킬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했다.
그후 이 실습지에 박물관이들어서 실습지를 효자동경류장 북쪽으로 옮겼다.
수공 또한 본교의 명물이었다. 학생들은 1학년때부터 4학년때까지 싸리·짚·버드나무· 철사·양철·대나무등믈 가지고 수공예품을 제작했다. 따라서 집안의 간단한 수리는 자유롭게할수 있어서 졸업 후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실업교육의 중시로 인해 학생들의 정서면은 너무나 고갈되었다. 한민족의 문화적 주체성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기만적 교육정책의 속셈때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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