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진 땐 장군 배가 맨 앞 … 승전 보고서엔 부하 앞세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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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희 교수

“흐리고 비가 내릴 듯했다. 홀로 배 위에 앉아 있으니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눈물이 났다. 천지간에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있으리오. 아들 회가 내 심정을 알고 매우 괴로워했다.”

 이순신이 명량해전(1597년·선조 30년) 5일 전에 쓴 일기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엄청난 중압감과 격무로 토사곽란에 시달리다가 인사불성이 되기도 했다. 일기에는 “새벽 2시경부터 토하기를 10여 차례 하고 밤새도록 앓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심지어 바로 밑의 장수인 경상 우수사 배설은 겁이 나 도망가 버렸다. 이런 상황에선 그도 좌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엄습한 두려움과 근심을 딛고 명량대첩을 치른 그는 『난중일기』에 “이번 승리야말로 천행(天幸: 하늘이 내린 행운)”이라고 썼다. 갖은 악조건에서 목숨까지 아끼지 않은 솔선수범, 뛰어난 리더십과 전략으로 큰 승리를 이끌어 냈지만 모든 공을 하늘에 돌린 것이다.

 이순신은 수많은 적선이 침입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후 부하들을 모아 놓고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는 자세로 싸워야 한다고 다짐했다. 실제 전투에서도 맨 앞에서 싸웠다. 그러나 이순신이 탄 배를 제외한 나머지 배들은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일기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사진 CJ E&M]

“내가 탄 배가 홀로 적진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면서 각종 총통들을 마구 쏘아 대니 그 소리가 마치 우레 치듯 하였다. 그러나 적선들이 여러 겹으로 둘러싸고 있어 내 배에 있던 부하들은 서로 돌아보며 겁에 질려 있었다(…). 여러 장수들의 배를 돌아보니 그들은 먼바다에 물러나 있으면서 바라만 보고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은 자신이 앞장서 겁에 질린 부하들의 동참을 이끌어 냈다. 그는 또 지형과 해류를 이용하는 전략과 전술로 기적과 같은 승리를 이뤄 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를 낮췄다. 이순신은 “나는 나라를 욕되게 했다. 오직 한 번 죽는 일만 남았다”는 말을 자주 할 정도로 책임의식이 강했다.

 또 부하들을 무척 아꼈다. 전쟁에서 희생을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부하들과 활쏘기 연습도 같이하고 글을 가르쳐주었으며, 술도 같이 마시며 위로하고 씨름대회도 자주 열었다. 죽은 부하들도 잊지 않았다. 그들의 시체를 거두어 고향에 묻히도록 하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쌀을 보내 주기도 했다. 또한 죽은 부하들의 합동제사를 주관하고 제문을 손수 쓰기도 했다. 이 제문에는 승리의 공을 부하들에게 돌리는 겸양의 미덕이 잘 드러나 있다.

 임금에게 승전보고서를 올릴 때에도 부하의 공을 앞세웠으며, 심지어 종들의 이름까지도 적었다. 이에 따라 부하들은 마음속 깊이 이순신을 존경하고 목숨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싸웠다. 이순신이 보여준 겸양의 미덕이 어부·농부·종들로 이루어진 우리 수군을 무적함대로 만든 밑거름이 된 것이다.

 저명한 경영 컨설턴트인 짐 콜린스는 경쟁기업을 압도하는 탁월한 성과를 내고 이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는 위대한 기업을 만든 리더들의 공통점을 연구했다. 그에 따르면 이 리더들은 뛰어난 업무능력, 팀워크 능력, 관리자로서의 비전 제시 및 동기부여 역량은 물론 ‘헌신과 겸양의 미덕’이 있다고 한다. ‘헌신과 겸양의 미덕’이 있어야 가장 높은 단계인 5단계 리더가 될 수 있으며, 이러한 리더들이 위대한 기업을 만든다고 했다. 5단계 리더들은 불굴의 의지로 헌신적으로 일을 해 엄청난 성과를 올린다. 그리고 그 공적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거나 운이 좋아서 성공했다고 겸손해한다는 것이다.

 세계 해전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전과를 거두고도 모든 공을 부하들과 하늘에 돌리는 겸양의 미덕을 보여준 이순신은 5단계 리더의 표상이다.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리더뿐만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밀도 있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훌륭한 리더가 되려면 구성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헤아리고 그 공적을 구성원들에게 돌리는 것에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지용희 세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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