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배명복 칼럼

미국에 북한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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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지금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태에서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이란, 우크라이나까지 미국 뜻대로 되는 것이 없는 국제정세 속에서 북한을 돌아볼 여유도 관심도 없습니다. 지금은 국내 정치뿐 아니라 외교정책에서도 최대한 추가 실점을 막는 것이 급하지 적극적으로 뭘 해서 득점을 노릴 국면이 아니라는 분위기입니다. 따라서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기존의 대북정책 노선인 ‘전략적 인내’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할 상황이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북한이 조용히 있어주기만 하면 그걸로 됐다는 인식입니다.”

 최근 워싱턴 사정에 밝은 지인으로부터 백악관 분위기를 전해들었다. 그에 따르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인 수전 라이스의 머릿속에 북한은 없다. 그 아래 실무담당자인 시드니 사일러 보좌관은 독자적인 시도를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권한과 책임을 갖고 전략적 차원에서 대북정책을 주도할 인물이 없기 때문에 지금 백악관에서 북한 문제는 공중에 붕 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사정은 국무부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다.

 “성 김 주한 미대사는 워싱턴에 귀임하는 대로 제임스 줌월트 동아태 부차관보 자리와 함께 글린 데이비스가 맡고 있는 대북정책 특별대표 직을 동시에 물러받게될 예정입니다. 성 김은 북한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이지만 백악관이 움직이지 않는 한 그가 새롭게 뭘 해볼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어보입니다. 게다가 직속상관인 대니얼 러셀 동아태 차관보 역시 북한에 대한 의구심이 매우 큰 사람이어서 성 김이 뭘 하려 해도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오바마는 지난 주말 2주간의 여름휴가를 떠나기에 앞서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과 한 시간 동안 인터뷰를 했다. 국제정세와 외교정책이 주제였다. 어제 아침자 인터내셔널 뉴욕타임스에는 장문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읽어봤지만 북한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다. 백악관은 물론이고 미 주류 언론의 시야에도 북한은 없다. 오바마 1기 행정부에서 국무부 비확산담당 특보를 지낸 로버트 아인혼이 북·미 대화 재개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광야의 외로운 목소리로 묻히는 분위기다. 얼마 전 존 케리 국무장관은 북한이 하루가 멀다고 단거리 미사일을 쏘아대는데도 미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전에 비해 조용해졌다”고 말해 시청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사실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개인적 희망이 그렇다는 뜻으로 들린다.

 문제는 미국의 기대대로 북한이 조용히 있어줄 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 조만간 추가 핵실험을 하고,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는 ‘사고’를 쳐서 CNN이 연일 톱뉴스로 보도하고, 의회가 시끄러워지고, 유엔 안보리가 분주해지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지금처럼 미국이 북한을 투명인간 취급을 하는 것은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종용하는 초대장이라고 봐야 한다.

 이를 우려한 한·미 외교장관은 지난주 미얀마에서 열린 아세안안보포럼(ARF)에서 북한에 추가 도발 자제를 강력히 촉구했지만 약발이 먹힐 것 같지 않다. 북한은 18~28일로 예정된 한·미 연례 연합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을 강행할 경우 4차 핵실험을 할 수 있다고 경고해왔다. 그러나 한·미 양국은 훈련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무조건 도발 자제를 촉구했다. 말에 무게를 실으려면 북한의 우려에 대해 배려하는 최소한의 제스처는 보였어야 한다. 한·미는 통상적인 방어훈련이란 이유만으로 예정대로 강행할 태세다. 말로만 떠드는 전형적인 확성기 외교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오바마는 북한 문제로 정치적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예상대로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상원까지 장악한다면 오바마는 곧바로 레임덕에 빠지게 된다. 임기 말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오바마의 임기가 끝나는 2016년 말까지 북한은 차곡차곡 핵무기 수를 늘려갈 것이다.

 이제 솔직해질 때가 됐다. 입장을 바꿔놓고 한국이나 미국이 북한 입장이라면 핵을 포기하겠는가. 핵을 포기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은 리비아의 카다피나 핵을 버리고 러시아에 유린당하는 우크라이나를 보고도 김정은이 핵을 포기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가. 적어도 가까운 장래에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는 실현 불가능한 꿈이라고 봐야 한다. 현 수준에서 더 늘어나지 않도록 동결하는 것이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이다. 비현실적인 북핵 폐기에 매달림으로써 우리가 치르고 있는 정치적·경제적 대가가 너무 크다. 북핵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미국을 쫓아 언제까지 우리의 자원을 낭비할 것인가. 북핵과 남북관계의 분리를 생각할 때가 됐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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