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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화 경기 80년사|일인교사 급증 수업시간에는 한국인 교사가|통역지원자 해마다 늘어 입시경쟁 치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을사보호 조약 후 통감부의 정치와 더불어 1906년 8월초부터 궁내부와 내부이하 각부에 일본인 차관이 임명되어 이른바 차관정치가 실시되었다.
학부에도 일본인으로 차관이 임명되었다. 경성고등학교에도 일본인교사들이 대거 등장했다. 한국인 교장 외에 일본인 「교감」을 두어 그를 수석으로 삼아 생도교육을 담당케했다.
관립중학교 개교당시에 「시데하라」가 촉탁 자격으로 교편을 잡았고, 그 후 두 명의 일본인이 정식교관으로 부임했는데 1906년 한성고등학교 개교를 계기로 4명이 발령받았다.
그 후 계속해서 일본인 교사가 부임되어 한국인 교원이 숫자에 열세일 때까지 있었다.
1907년 4월 이래 제6대 교장으로 재직하던 홍석현은 1910년 10월1일 조선총독부가 세워지는 날 해임되고 일본인이 교장직무대리로 임명되었다가 그 후 45년 해방까지 일본인이 8대에 걸쳐 교장을 맡게 되었다.
교육의 대체적인 방향도 을사조약체결을 계기로 격앙된 민족의식을 누르고 문과 이상에 기울고 있는 교육을 상업·농업·부기 등 실용적인 면으로 이끌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당국은 친일정책에 반항하여 애국정신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의 교과서를 엄중히 단속하는 반면 일본어교육의 강력한 실시를 통해 민심을 친일방향으로 유도했다.
이런 속에서도 국민의 신교육에 대한 열망은 점점 커져갔다.
관립중학교 시절에 그리 많은 학생이 몰려들지 않은 것과는 달리 관립 한성고등학교시절로 들어서자 입학지원자가 급격히 증가했다.
1907년에는 67명이 지원해 50명이 합격했지만 1908년에는 지원자가 1백51명으로 늘어나 그 중 80명이 입학했다. l909년에는 50명 모집에 1백여명이 지원해 4대1의 경쟁을 보였다. 당시 이같은 경쟁률은 상당히 높은 것이었다.
더우기 1911년도에는 모집인원이 갑자기 3배로 늘어 1백50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6백1명이 지원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관립 한성고둥학교의 학생모집에는 한가지 특색이 있었다.
모집인원의 일부를 무시험으로 선발한 점이 그것이다. 무시험 입학의 특전은 전국의 각 보통학교 우등 졸업자에게 부여되었다. 이 때문에 필기시험에 의한 경쟁은 더욱 심해졌다.
초창기에는 주로 서울에 살고있던 사람들이 입학했으나 1910년 한일합병을 전후하여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함경도 등 교통이 불편한 곳에서는 말을 타고 시험을 보러 왔다.
학교에서는 이처럼 갑자기 밀려드는 수험생들을 사람마다 분별하기가 어려우니까 책상에 번호를 매기기도 했고, 그것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아서 손에 「스탬프」를 찍어 입학시험 기간 중에는 목욕탕에 들어가지 말라고 까지 했다.
재학생의 중도 퇴학도 초창기를 넘기면서부터 현저히 줄어들었다. 가령 1907년 한성고등학교에 입학해 l911년 학업을 마친 제7회 졸업생의 예를 들자면, 입학생 49명중 졸업자는 15명에 불과했으나 이것은 1910년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느라고 10명을 조사요원으로 뽑아가고 또 신설된 총독부 철도국요원으로 데리고 가버렸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아직 교복은 정해지지 앉아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고 돈있는 학생은 구두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딱딱한 나막신을 신었다. 체조시간이면 재래식 나막신을 신은 학생이 다소 불편을 겪었는데 모자는 통일된 것을 쓰고 다녔다.
일본어가 어느 정도 보급되었어도 일본어 교사의 수업은 한국인 교사의 통역으로 가르쳤다. 통역이 필요없는 학과는 창가와 도화뿐이었다.
대한제국시대에는 지금 서울운동장이 있는 훈련원 터에서 시내 각 학교 대항 운동회가 매년 봄·가을 두차례 개최되었다.
이것은 일찌기 독립협회가 주관하여 시작한 것인데 합병 직전까지 장안의 인기를 독차지한 행사로 발전했다.
1907년 가을대회에는 황태자 영친왕이 참석해 5백원을 하사했고 각 부 대신과 「이몬」 (이등)통감·「하세가와」(장곡천) 한국주둔군 사령관도 참관했다. 대회가 끝나면 동궁이 친히 상을 내리고 학생들은 만세를 부르고 헤어졌다. 해마다 한성고등학교가 우승하던 이 대운동회는 한일합병과 동시에 금지되고 말았다.
한성고등학교 학생들은 일본인 체조교사 「요꼬찌·스데지로」(횡지사차낭)의 지도로 야구를 배워 l910년 훈련원에서 YMCA를 상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경기를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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